이거, 의리 초코야!”

 

성 밸런타인데이 (St. Valentine's Day) 라는 소녀들의 고백 데이에 맞춰 진심으로 위장한 거짓과 거짓으로 위장한 진심이 넘쳐나는 날. 그 거짓과 진심이 섞인 고백은 카라스노 고등학교 3학년 4반에도 넘쳐나고 있었다. 스가와라 코시. 특히 그에게.

 

 

 

 

 

 

 

 

 

St. Valentine's Day

W. Liell

 

 

 

 

 

 

 

 

 

 

스가와라 코시. 카라스노 고등학교 3학년 4. 연한 머리카락과 짙은 눈동자. 상냥한 성격에 다정한 말씨. 그리고 우선적으로 미소년. 근처 학교인 아오바죠사이의 오이카와 토오루 보다는 아니었지만 카라스노 고등학교 내부에서는 남몰래 그를 좋아하는 소녀들이 많다는 것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밸런타인데이 전부터 스가와라 코시라는 이름은 소녀들의 입술 위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이름 중 하나였다. 그런 소녀들의 반응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함정이기는 했지만 말이었다.

 

어느 때처럼 연습을 끝내고 나면서 신나있는 히나타의 모습에 언제나처럼 그 상냥한 모습으로 이유를 묻자 방긋방긋 웃으며 말하는 히나타의 대답에 그제야 이 학교의 공기 중에 떠도는 단 내의 이유를 알게 된 스가와라였다.

 

오늘 밸런타인데이잖아요! 초콜릿 받았으면 좋겠다~”

, 꼬맹이를 누가 좋아한다고?”

히나타 의리 초코도 있으니까 걱정 마.”

밸런타인데이, 그게 뭡니까?”

 

가지각색의 대답과 말을 늘어놓는 1학년들의 모습은 번외 적으로 즐거워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입 꼬리가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스가와라였다. 달콤한 것 보다는 매운 것을 더 좋아하는 그였지만, 그녀가 그에게 준다면 그 어떤 것 보다 맛있으리라. 겨울의 끝이 다가왔기 때문일까, 그리 춥지는 않았지만 강도 높은 훈련이 진행되고 있었기에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탈탈 털며 교복으로 갈아입은 그가 같은 반인 다이치의 팔을 끌며 먼저 부실을 벗어날 때 까지 1학년들과, 뒤늦게 대화에 참여한 2학년들끼리의 만담 아닌 만담이 펼쳐져 있었다.

 

스가,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거 같네.”

밸런타인이니까?”

 

거짓말. 스가와라 코시의 감정 그래프는 이런 작은, 그리고 유치한 ~데이 같은 상술에 올라갈 정도로 예민하지 않았다. 그의 감정 그래프가 올라가는, 아니 정확히 말해서 이런 식으로 빠르게 올라가는 이유는 단 하나. 그도 소개받았던 그 작은 소녀 때문임을 사와무라 다이치가 모를 리가 없었다.

 

오늘 방과 후 연습, 없지?”

 

가게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카이 코치가 양해를 구하며 방과 후에 있는 주 연습을 빼고 자유연습을 주었음을 미리 전달 받았다는 사실은 주장과 부주장, 그러니까 사와무라 다이치와 스가와라 코시만 알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있을 연습 시간에 알려주는 것이 아무래도 낫다 생각하는 타케다 선생님의 의견에 동의하며 그 때 전달해도 크게 늦지 않음을 알기에.

 

, 끝나고 뭐라도 있어?”

데이트?”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는 스가와라의 웃음에 사와무라는 허, 하는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익숙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스가와라 코우시의 저런 웃음. 그리 많이 짓지 않는 그 특유의 웃음. 저 웃음도, 그 작은 소녀 때문임을 사와무라 다이치는 모를 리가 없었다.

 

, . 알겠습니다. 부주장님.”

 

장난스럽게 받아치는 사와무라의 모습에 스가와라 역시 웃어넘기며 발걸음을 맞추며 단 내음이 진동하는 학교 건물로 향했다.

 

 

*

 

 

 

리아 스텔리어, 그러니까 스텔리어 가()에서 단 내음이 나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임을 다행으로 여기고선 난장판이 된 부엌을 바라보는 리아의 녹음을 담은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으로 부엌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가 향한 쪽은 붉은 하트모양의 적당한 크기의 상자. 이 난장판을 만들고 겨우 이뤄낸 소득 아닌 소득이었다.

 

한숨을 푹 내쉬고선 하트 모양의 상자를 들어 올려 흰 리본 끈으로 마무리를 하고 나서 부엌 바로 옆에 위치한 다이닝룸에 있는 테이블에 올려둔 그녀였다. 그 상태에서 몸을 돌리면 보이는 엉망이 된 부엌의 모습에 시선을 한 번, 다이닝룸 내부에 있는 시계를 한 번. 평소 같았으면 주위에 있는 메이드에게 도움을 청하면 되었지만 오늘, 부엌을 이렇게 만든 것은 정말 개인적인 자신의 상황 때문이었기에 도움을 청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도움을 청할 만큼 그녀가 양심이 없지도 않았다.

 

양심을 운운할 정도로 더러운 부엌의 모습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다시 한 번 묶고선 비장한 발걸음으로 그녀가 부엌으로 향한 시간은 130. 상자의 주인이 학교에서 끝나는 시간은 330. 정리를 하고, 준비를 하고, 그가 있는 곳으로 향해야 할 시간까지, 2시간이 남은 시간이었다.

 

 

*

 

 

연습이 끝나고 나서 교실에 들어가면, 보이는 건 분홍색을 필두로 여러 포장지로 쌓여있는 초콜릿들 그리고 그를 기다리는 초콜릿들. 의리 초코야, 라고 말하는 여학생이 있나 하면 스가와라, 그를 따로 불러내려는 여학생들까지. 그런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는 사와무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앞으로 밀려오는 의리 초코라던지, 따로 불러내는 목소리라던 지.

 

 

 

*

 

 

 

여기.”

얼굴이 붉어진 상태로 그에게 불쑥 내밀어지는 흰색 박스에 붉은 리본. 어떤 의미로 건네주는지 알 것만 같은 상황에 스가와라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교실 밖으로 불러진 상태로 이미 건물 밖으로 나온 상태. 점심시간 연습이 끝나고 나서 끌려 온 터라 살짝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찬 겨울바람 위로 흩날리고 있었다.

 

저기, 미안한데.”

좋아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건네져 온 고백 한마디. 얼굴이 잔뜩 붉어진 상태로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목소리로 그에게 건네는 목소리가 덜덜 떨려감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게 그에게 고백해 오는 목소리를 듣고 있는 그였다.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점심시간이 금방이라도 끝나가는 시간.

 

미안.”

 

차분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거절의 목소리를 내는 그의 입술은 딱 그 한 단어를 말했을 뿐, 더도, 덜도 없었다. 추가적인 설명이라던 지, 그녀의 고백을 거절하는 이유라던 지. 그런 건 전혀.

 

, 저기 그러면.”

 

그 이유를 묻기 위해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을 때, 귓가를 울리는 점심시간이 끝나가는 종소리. 그 소리를 듣고 스가와라는 가볍게, 그렇지만 한 없이 가볍지는 않게. 그렇게 뒤돌아섰다. 질문을 끝까지 듣지 않아도 물어보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았을 터. 하지만 그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그에게 고백한 그 소녀만이 서 있었을 뿐.

 

 

*

 

 

점심시간에 이치노세 하루카가 스가와라 코시에게 의리 초코가 아닌, 진심이 담긴 초코를 주었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카라스노 고교에서 예쁘기로 나름 소문난 이치노세 하루카를 찬 남자, 라는 말로 사와무라가 스가와라를 놀리자 가볍게 그를 바라보면서 싱긋, 하고 청량한 웃음을 지을 뿐, 스가와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와무라 뿐만이 아니라 5교시가 끝나고 나서 배구부 후배인 타나카와 니시노야가 뛰어와선

 

스가와라상!!!! 고백 받았는데 거절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라는 작은 소동을 부렸던 것을 빼면, 나름 순탄하게 오후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지나가는 시간 동안 스가와라는 계속해서 핸드폰만을 확인하고 있었을 뿐, 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다만, 매 쉬는 시간마다 한, 두 명의 학생들에게 의리 초코를 받거나, 진심 초코를 주며 고백하려는 여학생들의 부름에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 그리고 그 진심 초코를 손에 들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소문이 되어 학교 내부를 돌고 있었다.

 

 

*

 

 

 

백금색 머리카락은 웨이브를 만들며 등 위에서 탄력 있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녀의 이마를 사뿐히 가린 앞머리는 그녀의 이마를 살랑이며 간지럽히고 있었다. 아래로 갈수록 옅어지는 머리카락 위로 빨간색 체크무늬 베레모와 함께 채우지 않은 검은 코트. 그 아래로 보이는 붉은 체크무늬 치마가 한 세트인지 단정한 모습의 리아가 카라스노 고등학교 교문 앞에 도착한 것은 수업 시간이 끝나기 바로 5분 전. 그러니까 325분이었다. 급하게 차려입은 것 치고는 나름 괜찮지, 하면서 나온 그녀의 모습은 생각보다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

 

 

수업이 끝나고 교문 앞에 서 있는 리아의 모습에 학생들이 웅성거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작은 프랑스 인형같이 생긴 작은 소녀가-그것도 처음 보는, 그리고 고백할 것처럼 붉은색 상자를 들고-서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웅성거림 속, 작게 미소 짓는 한 소년이 있었다.

 

각자의 종례가 끝나고 교문 앞 작은 소녀에게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백금발과 연녹색 눈동자. 에메랄드를 박아 넣은 것만 같은 그 눈동자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어색하게 웃으면서도 살짝은 겁에 질린 것만 같은 눈동자가 한참을 흔들릴 때 쯤 어떤 한 소녀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누구 기다려?”

일본인처럼 생긴 외모는 아니었기에, 영어로 물어본 질문에 자신을 배려하는 질문이라는 걸 알고선 리아는 생긋, 예쁘게 웃으며 일본어로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들려오는 한 남자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그녀에게 질문한 소녀는 표정을 일그러트렸고, 맑게 웃으며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뛰어 안기는 그녀의 모습과,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시선이 몰렸을 때, 주위의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리아야.”

오빠!”

 

 

그러니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녀에게 말을 건 소녀-이치노세 하루카-의 고백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고백을 거절한 주인공인 스가와라 코시였으니까.

 

 

*

 

품에 안겨온 리아에게서 붉은 상자를 받아 들고 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는 스가와라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진 건 순간이었다. 주위를 돌아보다가 품에 안긴 리아가 살짝 꼬물거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상큼한 웃음을 지으며 리아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부끄러워하며 붉어진 얼굴을 가리는 리아와, 동시에 짙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주위를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기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 짙은 눈빛에 그들의 주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사와무라의 입술에서 깊은 한숨이 나오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런 그의 모습을 알 수 없었다. 단 한 사람, 스가와라 코시를 제외하곤.

 

 

*

 

 

자리를 옮겨 작은 카페에 앉아 리아에게서 받은 초콜릿을 열어보자 아기자기한 하트 모양의 초콜릿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었다. 그런 모습에 씩, 웃어 보이는 스가와라의 모습에 일단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직접..만든거라..맛은 장담 못하지만..”

 

말을 줄이는 그녀의 모습에 씩 웃으며 내려다 본 초콜릿은 직접 만든 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완벽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단 한 가지 모양만 빼고.

 

리아야, 근데 이건 뭐야?”

 

갈색 초콜릿 위에 주황색 선과, 초록색 선으로 무엇인가가 그려져 있는 것 같은 모양. 어디서 많이 본 모양임에도 불구하고 팍, 떠오르지 않자 결국 질문한 스가와라의 모습에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리아였다.

 

..배구..배구공이에요..모양..이상하죠..노력은 해 봤는데..영 아닌 거 같아서..”

 

역시 빼는 것이 가장 나았을 것이었다. 넣을까 말까, 제일 많이 고민했던 초콜릿이었다. 뭔가 의미 있는 초콜릿 모양을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그게 그녀 마음대로 되지 않아 결국 실패 아닌 실패를 해 버린 초콜릿이었기 때문에 끝까지 고민을 하다 결국 넣은 초콜릿이었는데.

 

맛있다, 리아야.”

 

그가 그 초콜릿을 제일 먼저 입안에 넣고 우물우물 씹을 것이라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그가 그 초콜릿을 먹었을 때 리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뻐, 마음에 들어. 누가 만들어 준 초콜릿인데. 너 마음만으로도 충분해. 못생기지 않았어. 모양이 이상하지도 않아. 이 모든 말을 축약해서 스가와라가 말한 것은 저 한마디였다. 상냥하게 다 말해주기는 싫었다. 그냥, 그냥 그녀가 그를 위해서 해 줬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표현하지 않는 것은 그의 취향에는 맞지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울먹일 것만 같은 그녀의 모습에 가장 먼저 튀어나온 말은 바로 그것이었다.

 

진짜요?”

 

초콜릿 안에 오렌지 시럽을 넣은 것인지 달달한 초콜릿과 상큼한 오렌지 향이 어울려져 스가와라의 입 안을 맴돌고 있었다.

 

, 진짜.”

 

믿지 못하는 것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보는 모습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몸을 일으켜 그녀의 옆으로 다가갈 때 까지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그였다. 눈꼬리를 살짝, 눈웃음을 살짝. 사랑스러운 그녀의 입술에 아주 가볍게.

 

*

 

 

리아 스텔리어는 알지 못했다. 스가와라 코시는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리아 스텔리어의 입술은 미치도록 달디 단 초콜릿과 같았고, 스가와라 코시는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과는 모순되게 리아 스텔리어에게 건네는 가벼운 키스를 제일 좋아했다.

 

 

*

 

 

그런 커플들의 모습을 축복이라도 하는 듯, 하늘에선 흰 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성 밸런타인데이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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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아 스텔리어가 스가와라 코우시를 처음 만난 날은 그녀의 사촌 오빠인 세미 에이타와 그녀가 다니는 시라토리자와 학원이 전국에 진출한 날이었다. 경기장 외부에서 길을 잃은 그녀를 발견하고 그가 길을 알려준 날운명처럼 리아 스텔리어는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반해버렸다. 우연이 필연이 되었고 필연이 운명이 되는 사랑을 리아 스텔리어는 두렵지 만 혼자서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그의 고백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빗방울 전주곡

W. Liell

 

 

 

 

 "좋아해요."

 

 

 

 어색한 존댓말과 어색한 웃음. 이 상황이 어색한 것인지 머리를 긁적이는 그의 하얗고 예쁘게 곧게 뻗은 손가락. 하지만 그녀가 항상 예쁘다고 생각했던 고동색 눈동자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그의 곧은 목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맑고 투명한 목소리로 무섭도록 아름다운 유혹을.  그의 그런 모습에 리아, 그녀의 짙은 에메랄드를 박아 넣은 것만 같은 녹음(綠陰)을 담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아얼마나 바래왔던 목소이었는가.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달콤한 목소리로 아주 사랑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며 설레는 표정을 짓고. 하지만 리아 스텔리어는 두려웠다. 몸이 덜덜 떨려왔다. 상냥하게 불어오는 초여름의 바람은 오랜만에 찾아온 열기를 날려버리는데도 상쾌하다는 느낌 보다는 찬물을 뒤집어 쓴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오싹함

 

 

 "리아양?"

 

 

 어색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 점점 그녀의 두 눈에 박혀있는 보석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덜덜 떨려오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조금은 당황한 듯 웃으며 그녀의 눈가로 손을 가져다대는 스가와라의 손길을 피한 건 그 때 였다.

 

 

 "죄송합니다. 못 들은 걸로 할게요."

 

 

 무언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몸을 돌려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모습에 당황해 쫓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스가와라는 멍하니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 토옥

 

 

 멍하니 굳어버린 그의 얼굴에 차갑게 떨어지는 무언가에 정신을 차린 스가와라가 멍하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비가 오네."

 

 

 

 

 

*

 

 

 

 

 

 "리아요? 리아 아파서 안 나왔는데요."

 

 

 그녀가 결석한지도 벌써 3일째였다. 감기라고 했다. 그렇게 뛰어가는 그녀를 잡지 못한 스가와라가 결국 찾아온 곳은 그녀가 다니고 있는 시라토리자와 학원. 무리를 해서 연습을 빠지고서 그가 향한 곳은 이 시라토리자와 학원이었다. 교문 밖으로 나오는 학생들을 잡아서 눈으로 그녀를 찾다 익숙한 얼굴의 한 소년을 발견하고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카와니시 타이치. 시라토리자와의 미들 블로커이자 리아, 그녀와 같은 반 학생이라고 들었던 소년그와 마주하고 물으니 돌아온 대답은 아프다, 였다.  익숙하게 리아라고 말하는 그 소년의 모습에 불쾌함 보다는 부러움이 더 먼저 드는 것도 찰나. 아프다는 말에 사색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날의 고백이 그녀를 아프게 한 것일까.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끊은 것은 카와니시였다.

 

 

 "리아 문병 가시려고요집 주소 알려드릴게요."

 

 

 같이 건네 오는 쪽지에는 그녀의 집 주소가 적혀 있었고 그런 그의 쪽지를 받아들고 스가와라 코우시는 뛸 수밖에 없었다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고 달려가는 스가와라의 모습에 카와니시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

 

 

 

 

 

 문을 두드릴까, 아니면 전화를 할까. 뛰어가면서 한참을 한 고민삼일 전 부터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은 어제 아침 기상예보에서 말하던 장마의 시작이었던 것인지 살짝 달아오른 대기를 빗방울이 차게 식히고 있었다. 스가와라의 은회색 머리카락 위에도 쏟아져 내리는 물방울은 상관도 없이 뛰어간 쪽지에 쓰인 주소.

 

 그가 마주한 집 앞은 평범한 집은 아니었다. 흰 철제 대문과 장미 넝쿨로 둘러싸인 담장. 대문 너머 보이는 흰색의 건물순간적으로 흠칫할 수밖에 없는 소리가 들려오는 건 그 때였다

 

 

 쇼팽의 피아노 전주곡 제 15번 빗방울 전주곡. 음악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그가 이 노래를 아는 이유는 리아, 그녀 때문이었다빗소리와 함께 그의 귀를 자극하는 그 노래를 듣는 순간 스가와라는 가만히 대문 앞에 서서 그 노래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톡, 톡 떨어질 때 마다 점점 강약을 조절하며 커지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푹 내쉬는 그였다. 가만히, 아주 가만히 듣던 중에 감정이 극대화되어 크게 내리치는 부분이 그의 귀에 들려오자 무슨 생각인지 모르게 스가와라 코우시는 핸드폰을 들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고백 이후 처음으로 거는 연락이었다.

 

 뚜르르-

 

 초조한 마음으로 대답이 들려오기를 바라는 순간 그의 귀에 들려오던 피아노 소리가 멈추고선 작은, 아주 작은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아주 작아서 그 누군가 들어도 그저 지나가는 사람의 목소리라고 생각할 만한 그런 목소리하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리아였기 때문에 스가와라 코우시는 그녀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간절했다. 부디 제발 받아주기를

 

 

 

 

 

*

 

 

 

 

 

 "아가씨 밖에 누가 있는데요."

 "? 누구요?"

 "누군지는 잘 모르겠어요... 은회색머리색의 남자분이시던데 검정색 교복을 입고 있으셔서 혹시 아가씨 친구 분이신가 해서요."

 

 

 직감적으로 그라는 걸 알았다. 검정 교복에 은회색머리. 근데 그가 여길 어떻게. 의문이 의문을 타고 흘러갔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의아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는 고용인에게 아니라고 말을 하려던 찰나 울리는 핸드폰과 그 핸드폰에 뜨는 '스가와라 코우시' 라는 이름.  몸을 일으켜 열려있는 연습실 창문으로 뛰쳐나갔다. 발끝에 닫는 잔디의 축축함도 인지하지 못하고선 대문까지 한달음에 달려가는 그녀였다.

 

대문 앞, 기대어 서 있는 그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무 말 없이 대문에 기대어 섰다. 등 뒤로 느껴지는 철제 대문의 찬 기운이 그녀의 몸을 타고 으슬으슬하게 올라왔다. 그렇지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기대어 서 그가 알아채기를, 하지만 알아채지 않기를 바라며 그렇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바람을 안 것인지, 아니면 알지 못한 것인지 그, 그러니까 스가와라 코우시는 그녀의 인기척을 빠르게 알아챘다.

 

몸은 좀, 괜찮아요?”

 

울컥. 다정한 목소리에 눈물이 차올랐다. 쏟아지는 빗물을 맞으면서 리아가 아무 말도 없자 가볍게, 하지만 깊게 웃으며 계속에서 다정한 목소리를 쏟아내는 스가와라의 목소리는 리아, 그녀의 눈물을 쏟아내게 할 정도의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덜덜 떨려오는 몸은 너무나 추워서인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감정을 그녀가 제어하지 못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울고 있는 걸 들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아프다고, 아니 학교에 찾아갔는데 아프다고 들어서 실례인건 알지만 이렇게 찾아와버렸어요.”

 

다정한 사람. 그녀가 사랑하는 저 남자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 그 상냥함은 리아, 그녀에게는 독과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모두에게 상냥하고, 다정한 그 모습은 그녀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었고, 그래서 더 무서웠다. 그저, 그가 느끼는 좋아한다는 감정은 그녀와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고, 관계의 깨어짐이 두려웠다. 그저 지금까지 그와 있었던 관계. 친한 오빠, 동생. 조금은 어색한 사이지만 그래도 매일 연락을 하고 지내는 두 사람의 사이가 발전한다고 하면 그 끝을 먼저 생각하고 있는 본인의 모습. 모든 것이 두려웠다. 겁이 많은 그녀였다. 좋아한다고 생각한 사람과의 끝을 생각하고 있는 그녀 스스로의 몸이 떨려오자 결국 주저앉아버리는 그녀였다.

 

아픈 건 좀 괜찮아요? 얼굴 보고 싶은데, 안 보여줄 거 같아서.”

눈물이 밀려왔다. 눈가에 흐르고 있는 것이, 얼굴에 흐르고 있는 것이 눈물인지 빗물인지는 아무도 모를 것 이었다. 눈물이 흐르고 빗물이 흐르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그녀도 마찬가지라고. 그녀도 그를 좋아하고 있다고.

 

괜찮았으면 좋겠어요. 가 볼게요. 다음에는 얼굴,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기대고 서 있었던 탓에 끼익, 하는 소리가 들리고선 발걸음이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뛰어가서 잡을 수 없어, 그렇게 리아 스텔리어는 눈물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

 

 

 

 

등 뒤로 느껴지는 인기척에 머리를 한 번 털었다. 축 젖은 머리카락이 그의 고동색 눈동자를 가렸다. 입술을 열고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몸을 일으켜 그 자리를 떠났다. 그녀가 무슨 연유로 자신의 고백을 거절한 것인지, 그를 피하는 것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스가와라 코우시는 욕심이 났다. 욕심. 리아 스텔리어를 향한 욕심. 절대 포기하지 않으리,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초여름의 비는 그의 그런 다짐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계속해서 쏟아져 내렸다.

 

장마의 시작이었고, 감정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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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tOxVFHEpzyA





 주화원(珠花園). 조선 내의 유명한 기생집의 이름이었다. 보석 꽃이 있는 동산 이라는 이름 답게 아름답기로 소문난 기생들이 많은 곳. 그 곳은 그런 곳이었다. 외모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가야금이면 가야금, 춤이면 춤, 뭐든 빠지지 않는 기녀들만 존재하는 곳. 그들이 파는 것은 웃음이 아니었다. 그들이 파는 것은 기예(技藝)였을 뿐. 그리고 주화원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아는 이름 하나. 화영(華榮)

 그녀의 원래 이름은 장화영(張花榮). 꽃 같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지어준 이름은 집안이 몰락하고 나서 화영(華英)-아직 피지 못한 꽃 봉우리-이라는 기명(妓名)으로 변모하여 그녀의 곁에 남아 그녀를 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화영, 그녀는 남들보다 밝은 머리색을 가지고 있었고, 남들보다 밝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미모는 그 누구보다 뛰어났고, 그녀의 기예도 그 누구보다 뛰어났다.

 

 몰락한 양반가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양반가의 여식. 그녀는 똑똑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그녀가 어릴 적 배운 모든 것들을 써먹을 수 있었다. 그녀는 주화원의 명기(名妓)였다.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고, 주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단 한 번도 웃음을 팔지 않았고, 몸을, 그리고 마음을 내주지 않았다. 머리를 올리지 않은 기녀. 그 이가 바로 화영, 그녀였다.

 

 하지만, 운명의 실타래는 언제나처럼 굴러갔다. 그녀의 손가락 끝, 보이지 않은 붉은 실이, 이미 그녀의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紅連

W. Liell

 

 

 

 

 

 

 화영(華榮), 그녀가 가장 잘 하는 것은 가야금을 타는 것. 음률(音律)에 유독 뛰어난 그녀의 특기이자 장기였다. 몸을 팔지 않고 기예를 파는 주화원의 이름에 가장 알맞은 그녀의 재능은 매일 밤, 사람들을 주화원으로 부르는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나 화영의 가야금이었다. 매일 연주하지는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연주한다 소문이 난 날이 될 때마다 주화원의 방은 사람들로 가득차고는 했다. 주화원 안에 있는 방이 아닌, 주화원 내부에 있는 월화루(月花樓), 그 위에 한 떨기 꽃처럼 그렇게 그녀는 혼자서 색색의 노래를 수놓는 일을 했다. 그녀의 연주를 들을 때 마다, 지체 높은 양반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거나, 어미 잃은 아이처럼 엉엉 울곤 했다.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그들이 누구와 있던지 간에 인간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자극하는 그녀의 연주에 사람들은 감정을 그대로, 본능적으로 보이곤 했다.

 

 그리고 친우인 대훈(大勛)을 따라 간 주화원에서 운명처럼 그 노래를 들은 것은, 조선에서 소문난 좌상의 아들, 지효(支孝)였다.

 

 장난기가 많지만 친절하고, 친절하지만 냉철하고, 냉철하지만 따스한. 문관이지만 무관의 자질도 가지고 있는 남가(南家)의 둘째 아들은 조선에서 녹을 먹는 이들에게는 한 번 쯤은 들어본 이름이었다. 성균관에서 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고, 무술 실력도 뛰어난 그가 제 아비를 따라 훌륭한 관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그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는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여기는 기방(妓房)이 아닌가, 내 이런 곳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지 않는가?”

 “평범한 기방이 아니니 친우께서 데려오신 것이 아닙니까. 오늘은 또, 저희 주화원(珠花園)의 꽃이 노래를 수놓는 날인데, 선비께서는 좋은 벗을 두셨군요.”

 

 

 

 화려한 옷을 입고, 희게 분칠을 하고, 붉디붉은 입술을 바르고, 하지만 한 없이 아름다울 뿐, 천박하지 않은 여성이 그의 곁에 앉아 술을 건네자 한숨을 푹 내쉬는 지효의 모습을 보는 대훈이었다. 제 친우가 이런 곳을 그리 즐기지 않는다는 걸 수 없이 많이 본 그로선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 화영(華榮)이 노래를 하는 날이라 했다. 이런 기방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부친조차도 그 화영의 노래를 듣기 위해 가끔씩 이곳을 찾는다 했으니, 한 번쯤은 나쁘지 않다. 라는 생각으로 지효를 끌고 온 대훈이었던 것이었다. 음률(音律)을 즐기는 지효였으니 더더욱.

 

 

 “그래서 언제 이 주화원의 못다 핀 꽃 한 송이가 노래를 수놓는 건가?”

 “지금은 유시(酉時)의 끝이고, 화영, 그 아이가 노래를 시작하는 시간은 술시(戌時)이니 곧 아이가 누각 위로 오를 것입니다. 그러니 선비님들은 조금 더 풍류에 취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풍류는 그 꽃이 살려줄 것이고, 술이나 더 따라주게. 저 친구에게도 더 따라주고.”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대훈의 행동에 지효는 한숨을 푹 쉬고선 제 앞에 있는 술잔만 들고 마실 뿐이었다. 봄 향기 가득한 술 맛을 찬찬히 음미하던 그의 곁으로 다가온 기녀 하나가 그의 옆에 있던 창을 열자 남색으로 바뀐 하늘 위를 살랑거리며 수놓는 벚꽃 잎이 만개하고, 그리고 그의 눈에 믿을 수 없는 인형(人形)이 보였다.

 

 갈색? 아니, 저건 틀림없이 금()의 색을 띄고 있었다. 머리를 수놓는 아름다운 금사(金絲)인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의 눈에 비춘 것은 틀림없는 금색의 머리카락이었다. 색색의 보석으로 장식한 머리를 틀어 올리고, 벚꽃(櫻花)의 꽃잎을 닮은 저고리를 그리고 치마를 입은 한 소녀? 여인?

 

 

 “벌써, 술시(戌時)가 다 되었나 보군요. 저희 주화원의 꽃인 화영이라는 아이랍니다. 선비님께서는 벌써 그 아이의 미모에 현혹 되신 것 같아 보이는군요.”

 “.......?”

 

 

 멀리서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달빛이 차오르는 그 모습에, 그리고 처음으로 튕기는 가야금의 맑은 소리에, 한 없이 아름다운 자태가, 그녀의 모든 모습이 지효, 그의 모든 시선을 잡아 당겼다.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공기를 타고 흐르는 아련한 떨림. 금방이라도 파드득 떨어질 것만 같은 눈물 섞인 음률. 서서히 젖어드는 공기와 아득히 멀어지는 것 같은 감각. 심장 한 켠, 아려오는 느낌. 점점 들려오는 음률에 금방이라도 헤어 나오지 못할 것만 같으면서도, 지효의 시선은 그저 한 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벚꽃을 닮은 그 소녀.

 

 그리고 서서히 잦아드는 노랫소리와, 차분히 잦아드는 감정의 휘몰아침, 그리고 그 때서야 마주한, 호수, 그러니까 월화루(月花樓) 아래 있는 월호(月湖)에 비추어 더더욱 아름다운 자태는 그의 시선을 잡아둘 수밖에 없는 천상(天上)의 미() 였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은 아련함을 담은 짙은 녹색의 눈동자가, 지효의 갈색 눈동자와 마주했을 때, 그래 그들은 운명적으로 그들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들은 전생의 연이 닿아, 월하(月下)노인이 이어준 붉은 실을, 그들의 손가락 끝에 매달고서 그들을 찾아 헤매어 이제야 마주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인연이, 그 붉은 실이 준 홍연(紅聯)의 끝이 그리, 아름답지 않을 것이라는 것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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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달 월간 드림 참여작 입니다.

* 스가리아

* 염장질이 매우 심합니다...

* 탈 주제 한 기분...(._.









 

우리가 사귀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간 봄 소풍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정말로 순간적으로 벚나무 아래에서 네 입술에 입을 맞췄고, 더운 여름날, 네 처음이었던 나츠 마츠리에서, 너는 언제나처럼 그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주었으며 그 미소 후에 잔뜩 부끄러워져 입술을 맞추던 너의 모습이, 그 모든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여 모든 추억 속에 담기고 있었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너를 만나고 난 그 다음부터 네가 없는 내 과거는 없었다. 내 전부가 너였고, 다가올 모든 계절이, 미래가, 바로 너였다.

 

 

 

 


사계절이 전부 너였다.

W.Liell 

 

 

 

 

시라토리자와 학원. 미야기 내 있는 사립 고교로 현 내 최고라고 불리는 왕자(王子) 우시지마 와카토시를 주축으로 이뤄진 배구부로 유명한 학교였다. 물론 스가와라 코우시에게는 이미 그 의미는 사라진지 오래였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던 간에 카라스노 교복을 입고 그 앞에 서 있는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유난히 학생들은 오늘따라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를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는 학생들도 있었고, 누구를 기다리냐며, 할 일이 없으면 자신과 가자며 말을 건네는 여학생까지. , 두 번 온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따라 많은 이들이 붙자 결국은 핸드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려던 그의 손을 멈추게 하는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너가 왜 여기 있냐?”

리아랑 데이트하기로 했거든.”

.”

 

 

크림의 끝에 초콜릿이 묻은 것만 같은 머리카락. 날카로운 말투로 그에게 말을 건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세미 에이타, 시라토리자와의 세터였다. 착한 오빠에요. 라고 말하는 리아의 말과는 달리 유독 스가와라, 그에게 날카롭게 구는 세미 에이타의 모습에도 그저 스가와라는 웃으며 그의 목적을 순순히 알려주었다. 그가 왜 그렇게 날카롭게 구는지 이미 리아를 통해 들었으니까.

 

 

오빠?”

 

 

그리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제 사랑하는 연인의 목소리에도 자동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단정하게 입은 교복 위로 흩어져 내리는 금발의 그 머리카락은 이 가을의 햇빛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짧은 치마를 입은 것을 잊은 것인지 평소답지 않게 빠르게 뛰어오는 그녀의 모습에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가 품에 안아오는 스가와라였다. 물론 그들의 그 모습에 좋지 않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질투 섞인 시선을 보내오는 세미였지만, 그런 그의 시선이 하루 이틀인가, 라는 생각으로 품에 안겨 배시시 웃어 보이는 리아였다.

 

 

오늘 연습은요?”

오늘은 없어, 데이트 하려고 데리러 왔어 리아야.”

 

 

달큰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 순간 확, 달아오른 얼굴에 그의 품에 부비적거리다가 고개를 드는 리아의 모습을 보며 예쁘게 웃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품 안의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으니까.

 

하루하나.”

 

한참을 껴안고 잔뜩 염장을 지르고 있던 두 사람의 귀로 세미의 목소리가 찾아든 건 그 때였다. 그가 말한 하루하나에 반응한 건, 리아였다. 순간 움찔 하고선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건 세미 에이타의 장난스러운 웃음이 걸린 얼굴이었다.

 

세미 하루하나, 일찍 안 들어오면 이모한테 다 말 할 거니까,”

오빠!”

그러면 데이트 잘하고, 제 시간에 잘 데려다 줘라.”

 

 

경고성이 살짝 묻어나오는 목소리에 움찔하는 리아를 느끼고선 품에 안고 다독여 주는 스가와라였다. 왜 저러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우선은 자리를 옮기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한 스가와라가 품에서 리아를 빼내, 그녀의 작은 손을 잡아 손깍지를 끼웠다.

 

 

갈까?”

..!”

 

 

 

 

 

*

 

 

 

 

 

서로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겨 그들이 향한 곳은 영화관이었다. 보고 싶은 영화가 최근에 개봉했다던 그녀의 말을 기억 하고 있었던 그였다. 예의 그 아름다운 보석을 박아 넣은 것 같은 녹안을 반짝이며 그에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을 잊어버리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큰 콜라와 팝콘을 하나씩 사서, 들어간 극장 안은 아직 시작 되지 않은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조명이 다 꺼지지 않은 상태로 광고를 계속 보여주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손잡이가 있나, 확인하려 손을 휘적이다가 보니 아무것도 없는 느낌에 옆을 보면 어색하게 웃으며 여기 커플석, 이라며 소근 거리는 스가와라의 모습이 리아의 눈에 비춰졌다. , 달아올라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고 할 때 마침 타이밍 좋게 조명이 다 꺼져버려 다행의 의미의 한숨을 푹 내쉬는 리아였다.

 

그녀가 보고 싶어 했던 영화는Goodbye Summer라는 제목의 영화였다. 이미 다 커버려, 서로를 잊고 살 무렵, 언젠가 같이 찍었던 졸업식의 사진이 우연처럼 여자의 어깨 위로 떨어져, 그 때의 서로를 생각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시작으로 과거 학생 때의 두 사람의 모습이 스크린에 하나, 둘 펼쳐지기 시작했다.

 

교실에서 떠들다 걸려 복도에서 손을 들고 서 있었던 두 사람의 모습, 중학교 졸업식 때 울고 있는 여자 주인공을 달래주면서도 눈물을 꾹 참고 있는 남자의 모습. 같이 간 마츠리에서 불꽃놀이를 보며 예쁘게 웃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 웃는 남자의 모습. 그리고 영화의 끝으로 갈 때 쯤, 서로의 감정을 독백으로 털어놓는 두 사람의 모습까지.

 

어떻게 보면 진부한 그 영화를 보며 리아는 웃고, 울며, 영화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리아의 모습에 조금은 섭섭해지려고 하던 찰나, 마침내 만난 두 사람이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나서의 키스를 나눌 때, 스크린 빛에 반사 되어 부끄럽게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리아의 모습이 스가와라의 눈에 들어왔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잡아, 눈을 마주하고, 파르르 속눈썹을 떨며 그 짙은 녹색의 눈을 감는 리아의 입술에 가볍게 내려앉은 스가와라의 입술, 동시에 그의 따스한 눈동자도 천천히 시야에서 사라져 내렸다.

 

 

 

 

*

 

 

 

 

재밌었어?”

, 기대했던 영화였는데 너무 재밌었어요.”

 

 

영화를 다 보고 영화관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겨 재잘거리는 리아를 바라보고 있는 스가였다. 여간 마음에 들었던 것이 아니었던 건지 신나게 재잘거리는 리아를 보면서 웃어 보이다가 장난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걸치며 작게 속삭이는 스가의 질문에 헉, 하고 숨이 멎은 리아였다. 고개를 가까이 해 입술과 입술이 닿을 것만 같이 그녀의 얼굴로 다가가선,

 

 

키스는?”

 

 

라며 그 답지 않은 장난을 치자, -, 순간적으로 빠르게 달아오른 얼굴이 느껴지는 리아가 얼굴을 잡고선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가린 얼굴뿐만 아니라 귀 끝까지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모습에 가볍게 웃으면서 그녀의 얼굴을 가린 손을 부드럽게 잡아내려 그 손끝 마디마디에도 가볍게, , 촉 입을 맞추는 스가와라의 행동에 사과보다 더 붉어져 고개만 푹 숙이고 있는 리아였다.

 

 

우리 리아 이렇게 부끄러워해서 어쩔까.”

 

 

장난스러운 말까지. 작정하고 그녀를 놀리는 그의 행동에 푹, 고개를 숙이고 웅얼거리자, 푸스스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그녀의 손을 잡은 손을 내려놓았다. 제 작은 연인이 수줍음이 많다는 것은 그 역시도 잘 알고 있었지만 뻔히 알면서도 이렇게 놀리는 이유는, 단지 그녀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자신 앞에서 만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묘한 소유욕, 그가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 중에 하나였다.

 

 

오빠아...”

 

 

말꼬리를 길게 늘여 말하는 리아의 말에 씩, 웃으며 몸을 뒤로 빼선 바르게 앉는 스가와라였다. 더 하면 울려버릴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

 

 

 

 

 

, 벌써 9시네. 슬슬 돌아갈까?”

 

학교가 끝나고 바로 영화를 보러 온 것이기도 하고, 저녁을 먹고 나서 150분의 러닝 타임은 아무래도 무리였던 것인지, 이미 늦은 밤이 되어버린 걸 지금에서야 확인한 두 사람이었다. 딱히 뭘 챙길 필요는 없었던 두 사람이어기 때문에 가방만 챙겨 카페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이 천천히, 정류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물론 두 사람의 손은 서로의 손을 잡은 채로.

 

시내의 정류장이었기 때문일까, 꽤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내리고를 반복할 동안 두 사람의 집으로 향하는 마지막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자 그 둘을 포함해, 대여섯 명의 사람들만이 버스에 올라탔다. 여전히 손을 맞잡은 채 맨 뒷자리에 앉아 소곤소곤, 서로의 얼굴을 보고 작게 웃으며 대화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버스 안에 몇 없는 사람들 사이에 숨겨져 그들만의 세상을 만든 것처럼.

 

한참을 그렇게 얘기했을까. 조금은 피곤했던 것인지 작게 하품을 하는 리아를 보고 웃으며 어깨에 기대라며 톡톡 치자 살포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오는 리아였다. 아무래도 키 차이가 나는 편인지라 살짝 몸을 내린 상태로 그녀의 어깨를 살살 잡자 품에 파고들며 금방 잠에 빠지는 그녀였다. 체력이 워낙에 약한 탓임을 알고 있어서 조용히 품에서 자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속삭이는 스가와라였다.

 

 

리아야. 우리 다음에도 데이트 하자. 이렇게 우리 둘이서, 손잡고 어디든 가자. 너랑 하고 싶은 일이 많아. 욕심내고 싶은 일도 많아. 너로 인해서 내 과거는 이미 다 사라진 기분이야. 오로지 나한테 있는 건 너랑 함께 하고 싶은 미래야. 그래서, 네 미래에 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욕심이 났다. 스가와라 코우시가 유일하게 욕심을 내는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아직 일 년이 채 되지 않은 커플이었고,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그녀라는 것도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더 무서웠고, 욕심이 생겼다. 그녀의 미래를 같이 걷고 싶었다. 아직 오지 않은 가을과, 겨울도 그녀와 함께, 그리고 또 다시 새로운 봄을 맞이하고 싶었다. 사계절이 그녀이기를 바랐다. 항상 그와 함께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욕심은 생각하는 만큼 커지고, 커져서 그가 감당하기 힘든 정도까지 커져버렸다.

 

품에 안겨 잠을 자는 리아의 얼굴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금에서 뽑아 만든 것 같은 속눈썹 아래, 숨어있는 녹안(綠眼)을 그는 좋아했다. 그녀의 몸을 흘러내리는 그녀의 아름다운 금발도 그는 좋아했다. 그녀의 밝은 성격도, 그녀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도, 모두 다.

 

시선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다 보이는 건, 그녀의 붉은 입술이었다. 그래서,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아무도 없는 버스 안, 고요한 밤의 정적을 깨는 건 버스의 엔진이 광광 울고 있는 소리 뿐. 동화속의 한 장면처럼, 공주님에게 도둑 키스하는 왕자님처럼, 그렇게 스가와라 코우시는 제 작은 연인에게 몰래, 도둑키스를 했다.

 

 

그래 가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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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가랠 

 * 말할 수 없는 비밀 AU

 * 공포 6,713자 공미포 4,700자



https://youtu.be/9aEWRCKXjUw




 

그래, 넌 내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다.






w. liell








 화란 예술고교(花蘭 芸術高校). 일본 내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예술 고등학교이며 유명한 예술가들을 잔뜩 배출해 낸 가장 오래 된 학교의 이름이다매년 더도덜도 말고 딱 50명만의 입학생을 받고 있으며 전교생은 150명뿐인 매우 작은 학교이기도 했다. 25명의 미술과 학생, 25명의 음악과 학생그리고 그 학교에 스가와라 코우시(官原 孝支)는 특별 전학생의 신분으로 학교의 교문을 밟았다.

 

 올해의 입학생은 50명으로 동일했지만 안타깝게도 3학년 중 한 학생이 학교를 자퇴했고마침 해외에서 국내로 들어온 그를 학교에서 스카웃 한 케이스였다스가와라 코우시섬세한 터치부드러운 색채독특한 묘사국내외 모든 화가들이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지만 그는 학교에 다니고 싶다며 학교의 스카웃 제의를 받아들였다.

 

 

*

 

 

 길이 어지럽고 넓기로 악명 높은 화란 고교에 온 첫날이었기 때문일까모두들 한 번은 길을 잃는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스가와라 코우시그 역시 길을 잃어버렸던 찰나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에 저절로 발이 소리를 따라 옮겨져 정신을 차려보니 오래된 피아노 한 대와건반 위에서 손을 내리는 작은 소녀와 눈이 마주친 상태였다.

 

 “누구세요?”

 “전학 왔는데요...길을 잃어서요...”

 

 화들짝 놀라 그를 바라보는 작은 소녀에게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머리를 긁적이면서 길을 잃었다말하자 작은 소녀는 의자에서 일어나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금발의 머리카락심연 그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깊은 녹색의 눈동자()같은 차고 흰 피부까지 일본인이라고 하기에는 조금은 이국적인 외모의 소녀에게 눈을 뗄 수 없었던 그 순간,

 

 “미술과 학생이신가 봐요길 알려 드릴게요 따라오세요.”

 

 상냥한 목소리작게 웃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어색하게 웃으며 그녀를 따라 갈 수밖에 없었다.

 

 구두 굽이 복도에 부딛혀 내는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에 울려 퍼질 때어색함을 떨치고자 먼저 입을 연 쪽은 스가와라의 쪽이었다.

 

 “저기이름이 뭐에요?”

 “리아 스텔리어라고 해요. 1학년 음악반이에요.”

 

 그래여기서 스가와라 코우시가 무언가를 알아챘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하지만스가와라 코우시는 오늘 전학을 온 전학생이었을 뿐이었고음악반에 대해선 특히 더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음악반과 미술반은 원래 건물이 분리 되어 있었고따라서 딱히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각자의 음악반과 미술반 학생들은 서로를 알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스가와라 코우시에요말했던 것처럼 미술반이고요오늘 전학 왔어요.”

  “....”

 그녀그러니까 리아의 담백한 반응에 놀란 쪽은 확실히 스가였다그도 그렇게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의 이름을 들을 때 마다 사람들은 언제나 놀라며 그에게 사인을 해 달라고 하던가악수를 하게 해 달라거나 등등의 요구를 해왔으니까.

 

 “미술과 건물은 여기에요목란(木蘭).”

 “고마워아니 고마워요.”

 “편하게 말 하셔도 괜찮아요명찰색, 3학년 맞으시죠?”

 “으응.”

 “저는 2학년이에요그러면 미술과 건물까지 데려다 드렸으니까 저는 가 볼게요.”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몸을 돌려 가는 그녀의 뒷 모습을 가볍게 바라보다가 순간 무언가 생각이 나 뒤돌아 가는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부르는 스가와라였다.

 

 “리아양!”

 “?”

 “아까 친 노래혹시 제목이 뭔지 알 수 있을까?”

 

 낯선 곡을 듣고 그녀를 만났다그래서 그 노래를 찾아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그였다그래서 그녀에게 물어봤건만,

 

 “비밀이에요.”

 

 돌아오는 대답은 그것이었다생긋 웃어 보이며 가볍게 몸을 숙이고선 다시 뒤를 돌아가는 그녀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수업을 들으면서 그녀를 보는 일은 없었다미술반과 음악반은 수업 자체가 완전히 달랐고건물조차 달랐기 때문에 지나치면서 보는 일도 거의 없었다관심을 끊으면 되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그 날 이후로 그는 계속 그녀를 생각하고는 했다그래서 결국 그는 그녀를 처음 만난 곳으로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가 어느 정도 지리에 적응이 되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그녀와 처음 만난 곳은 과거 음악과와 미술과가 같이 있었던화란 예술고교가 처음 시작 되었던 구 건물이었다.

 

 미술과 건물인 목란(木蘭)관에서는 꽤 거리가 있는 건물이라 미술과 학생들은 그 곳에 자주 가지 않고오히려 피아노가 있어서 음악과 학생들이 더 많이 가는 건물이라며 그 곳은 어떻게 알게 된 거냐 물어오는 쿠로오의 물음에 어색하게 웃으며 그냥길을 잃었다가라는 말로 둘러대는 스가와라였다.

 

 “음악관인 매화(梅花)관 근처니까음악과 학생들이 많을거고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저번에 길 잃었을 때 알려준 여자애가 음악과라고 했거든.”

 “예쁘냐?”

 

 시덥지 않은 농을 던지다가 수업 종이 치는 소리에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 가는 쿠로오의 모습에 헛헛하게 웃으며 작게 속삭이는 스가와라였다.

 

 “예쁘더라.”

 

 

*

 

 

 어느 정도 지리에 익숙해진 덕분에 길을 잃지 않고구 건물에 도착한 스가와라였다그리고 들려오는 익숙한 노래 소리에 발걸음을 빨리해 처음 만났던 그 방 앞에 서자보이는 건 이미 피아노를 다 치고 손을 건반 아래로 내린 리아의 모습이었다.

 

 “오랜만이에요스가와라상.”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수줍게 웃으며 그에게 가벼운 인사를 하자 그제야 조금 몸이 풀어져 장난스럽게 웃으며 농을 던지는 스가와라였다.

 

 “그래서 오늘도 그 노래의 제목은 비밀로 남겨두는 거야?”

 “그러게요대신 오늘은 다른 노래를 쳐 드릴까요익숙한 노래일지도 모르지만요.”

 

 두 번째 만남임에도 불구하고 몇 차례 만난 친한 사이처럼 가볍게 웃으며 그에게 손짓하는 그녀를 보고 웃으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는 스가와라였다피아노 의자에 가볍게 걸터앉는 그를 보고 움찔 하는 것도 잠깐가볍게 심호흡을 하며 손가락을 건반 위로 올리며 천천히 한 음한 음을 누르기 시작하는 그녀였다.

 

 야상곡(夜想曲)이라는 이름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쇼팽의 녹턴가볍지만 깊고정확한 음을 가지고 있지만몽환적인 그 노래를 그녀는 사뿐히그에게 들려주고 있었다감정의 변화는 없지만 점점 커져가면서도 또 다시 사그라드는 음을 눈을 감고 음미하는 그의 모습에 피아노를 치던 그녀가 웃으며 피아노의 터치를 계속했다물이 흐르는 것만 같은 음색이 한참을 흐르다 멈췄을 때스가와라가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쇼팽은 운명 같은 사랑을 한 음악가에요나도그런 사랑을 하고 싶어요.”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는 것 같아 보이는 그녀의 모습이 그의 눈동자 안에 가득 찼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그를 담지 않고 저 멀리 어딘가에 놓인 무언가를 담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

 

 

 두 사람의 그 비밀스러운 구 건물에서의 만남은 점점 범위가 넓어져 갔다구 건물이 아닌매화관 근처목란관 근처그리고 그녀의 집 앞학교에서 조금 가면 있는 강가까지한 학기에 단 한 번음악과와 미술과의 공통 수업이 있는 그 날에는 옆 자리에 앉아 수업을 듣기까지 했었다리아는 생각보다 수업을 잘 듣는 학생은 아니었고스가와라는 그런 그녀를 보고 웃다가 선생님에게 혼날 번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그들이 그들의 감정을 알아채는 건그리 늦지 않은 시점이었다서로 말하지는 않아도서로의 감정이 같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손을 잡고작은 그녀를 그의 품에 안고그래그렇게 행복하기만 할 것이라 생각했다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사실은,

 

 그래그들은 그들의 감정을 입 밖으로서로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

 

 

 “여기 없어질 거라더라.”

 

 가볍게 던진 스가와라의 말에 순간적으로 얼굴이 확 굳는 리아의 모습에 놀라 그녀에게 왜냐고 묻자 고개만 가로저으며 애써 웃어 보이는 리아였다.

 

 “근데리아야 나 물어볼 거 있어.”

 “뭔데요?”

 “매화관에 더 좋은 피아노가 있는 거 아니었어?”

 “아마도요?”

 “근데 구 건물에 있는 피아노실만 가는 이유가 따로 있어?”

 

 그저 궁금하다는 듯물어오는 스가와라의 물음에 리아는 고개만 돌리며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냥거기가 편해서요오빠 혹시 피아노 칠 줄 알아요?”

 

 작은 목소리로 대답하고 나서 대화의 주제를 바꾸는 리아의 물음에 한 치의 의심조차 하지 않고선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옛날에 한 번 배웠었는데음악과 학생 앞에서 칠 정도는 아니지.”

 “그러면 알려줄까요오빠가 궁금해 했던 노래.”

 “진짜?”

 

 물어볼 때 마다 비밀’ 이라고 말했던 노래를 알려준다는 리아의 말에 미술과 학생치고는 격한 반응을 보이는 스가와라였다정말로 궁금했었던 것인지 그렇게 나오는 반응에 리아의 입가에는 옅게 미소가 걸렸다.

 

 “알려줄게요.”

 “지금?”

 피아노를 열고 천천히 한 음한 음쳐 내려가는 리아의 길게 뻗은 손가락을 보고 멜로디를 따라가는 스가와라의 눈이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진지해진 것을빠른 템포였음에도 불구하고 음 하나 하나 정확하게 따고 손가락을 가볍게 까닥이는 스가와라를 리아는 그 역시도 모르고 있었다그리고 리아가 몰랐던 것 중에 하나는사실 스가와라가 피아노를 꽤 잘 친다는 것이었고미술 적인 부분에서 유명했었던 것이지 피아노 역시 수준급으로 친다는 것을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빨리 쳐?”

 “집에 가기 전에는 항상 이렇게 빨리 쳐요.”

 “?”

 “그리고오빠 만약에 이 노래를 칠 일이아주 만약에 있다면절대 우리가 처음 만난 그 방의 피아노로 치면 안 돼요.”

 “?”

 “소리가 안 좋거든요.”


 등을 마주하고 있는 두 사람이었기에스가와라 코우시는 알지 못했다리아 스텔리어가 입술을 깨물고눈물을 삼키고 있다는 것을.

 

 

*

 

 

 “좋아합니다사귀어 주세요.”

 

 여느 때와 같이 리아를 만나러 구관을 가고 있던 스가와라를 막은 건 한 소녀였다교복 위에 있는 명찰은 음악과라는 표식을 보여주고 있었고가끔 리아를 만나러 갈 때 스쳐 지나갔던 학생이라는 걸 깊은 기억 속에서 끄집어 낼 수 있었다.

 

 “미안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어.”

 “그럼한 번만 안아주시면 안 될까요?”

 

포옹정도야무리는 아니지라는 생각이 순간 들었고 스가와라는 눈물이 글썽이는 그 소녀를 안아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스가와라 코우시는 알지 못했다그의 그 행동을 후회할 것이라는 걸.

 

 

*

 

 

 그 날 이후스가와라는 리아를 보지 못 했다아니 정확히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존재 자체가 원래 없었다는 것처럼그녀를 아는 사람도 없었고본 사람도 없었다정말 말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미술과 학생들에게도안면조차 없는 음악과 학생들에게도 수차례 물어보고 다녔지만그들 모두 그녀가 누군지 모른다고 했다.

 

 분명히 그는 그녀를 봐왔는데그녀와 손을 잡았고그녀를 품에 안았고그리고 그녀가 자는 사이에 몰래도둑 키스까지 했는데아무도 그녀가 누군지 모른다고 했다리아 스텔리어라는 사람이 누군지.

 

 “너 그 수업 혼자서 들었잖아미친 사람처럼 혼자 웃길래 뭔가 했는데?”

 “스가쨩 그 수업 혼자 들었잖아오이카와상이랑 쿠로쨩이 같이 듣자고 했었는데.”

 

 음악과와 미술과한 학기에 한 번 듣는 수업 때 스가와라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그렇게 소개했지만 동급생인 쿠로오 테츠로나오이카와 토오루는 그렇게 말했다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그때부터였다.

 

 한 학년에 25명밖에 안 되는 음악과 학생들이었다근데그가 만나서 리아를 물은 건 25명의 2학년 학생들이었다머리가 차게 식었다그녀는누구였던 거지혼란이그의 머리 속을 가득 채웠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하루하루를 힘들어 했다. 3학년 졸업 작품 준비도 하나도 할 수 없었다졸업을 위해 그려야 하는 주제는 매 년 달랐지만올 해의 주제는 자유 주제였다주제에 한정되어 학생들의 작품을 가두지 않겠다는 이사장의 지침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스가와라는 붓을 들었다그가 가장 먼저 붓을 들고 한 행동은 초록색 물감을 묻혀 캔버스에 그은 것이었다그가 작업하는 공간은 학교의 구 건물이었다그녀와 처음 만난 그 피아노 앞에서그는 그 피아노를 치고 있는 작은 소녀를 그려갔다갈색고풍스러운 그랜드 피아노 앞에 앉아 피아노를 치고웃던 작은 소녀를.

 

 생각보다 작업은 빠르게 진행 되었다금에서 뽑아낸 실처럼 영롱한 금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는깊은 심연의 초록을 담은 눈동자를모두가 입는 교복을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만들어냈던 모습을 스가와라의 붓이 캔버스를 스칠 때 마다마법처럼 그가 사랑하는 소녀의 모습으로 바뀌어 갔다.

 

 

 그는 졸업 작품을 냈다그의 작품명은 단 한 글자였다


<


그래그에게 그녀는 그 단 한 글자로도 충분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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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여름 밤

 

 

 

 

 

 

스가와라 코우시 X 리아 스텔리어

 

W. Liell (@Liell_with_U)

 

 

 

 

 https://youtu.be/dTdUj21tGmI

 

 

 

 

 

 

 

 

 

 

 

 

 

 

 

 

 

 

 

 

 

1년에 한 번, 연인 사이인 견우와 직녀가 밤하늘의 은하수에서 만난다는 낭만적인 이야기가 있다. 이들이 만나는 날이 77일 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날을 축하하기 위해서 칠석제를 여는데, 특히 센다이에서 열리는 타나바타 마츠리 (仙台七夕まつり)는 꽤 큰 규모로 벌어지고 있었다.

 

 

 

*

 

 

 

그래서 스가와라 코우시는 그 모습을 제 연인인 리아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다. 일본인이지만 일본인이 아닌 그녀, 그녀가 일본에서 처음 가는 마츠리가 자신과 함께하는 마츠리이기를 바랬고, 그의 바람대로 그와 함께하는 마츠리가 첫 마츠리라고 작게 웃으며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작은 충족감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 그 단어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예전과 달리, 제 연인의 처음을 함께 하고 싶은 욕심은 제 연인의 얼굴을 볼 때 마다 들어 그런 스스로가 어색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어색한 기분이 이상하거나 꺼림칙하지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그녀의 처음이라는 것을, 첫 기억을 함께 할 수 있어서.

 

 

 

*

 

 

 

리아야, 녹색은 어때?”

으음....”

이 분홍색은?”

 

 

한참을 고민하며 뱅뱅 도는 리아의 모습에 그녀의 엄마가 그녀에게 유카타 하나를 건네자 또 다시 한참을 고민하는 리아였다. 연녹색에 옅은 노란색 꽃이 자잘하게 수놓아져 있는 유카타를 보고 갸웃하다가 다시 뱅뱅 도는 리아가 결국 엄마에게 SOS를 청했다.

 

 

으으..모르겠어..엄마 골라주면 안 돼요?”

그러면 이걸로 하자. 리아는 뭘 입어도 예쁘지만.”

, 엄마 쫌..!”

 

 

팔불출스러운 말을 하는 엄마의 말에 얼굴이 붉어져 건네는 유카타를 손에 들었다. 평소 같았더라면 세미 가() 특유의 머리색과 맞춘 크림색 기모노를 입었겠지만, 오늘 입을 유카타에는 크고 작은 빨간 꽃이 진한 검정색 천위에 잔뜩 수 놓여 있었다. 꽃 색과 맞춘 것인지 조금 더 진한 붉은 오비 끈 까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웃으며 그녀의 유카타에 잘 어울리는 장식까지 전부 다 들고서 드레스 룸을 빠져 나오는 두 사람이었다.

 

 

 

*

 

 

 

약속시간이 다 되어가자, 몸을 일으켜 시계탑 아래로 향하는 스가와라였다. 검정색을 바탕으로 회색 사선이 그어진 유카타를 입고 붉은 와인 빛 오비로 허리를 묶어 단정한 모습으로 그의 연인을 기다리고 있던 찰나, 저 멀리서 보이는 눈에 익은 백금발의 소녀에게 손을 흔들려다가 멈칫, 손을 든 채로 굳어 버렸다. 가까이, 게다와 바닥이 닿아 나는 달각 거리는 소리가 천천히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그의 시선이, 그의 모든 것이 닿아 있는 곳은 그가 기다리던 이의 전부였다.

 

옅은 금발 사이사이로 보이는 은발까지. 틀어 올린 머리끝에는 한 송이 붉은 장미와 검정색 구슬들이 머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틀어 올린 머리들 사이에서도 조금 삐져나온 잔머리들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듯 그 길고 흰 손가락으로 귓가에 살랑거리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배시시 웃어 보이는 그녀였다. 한 치의 빛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검은 유카타 위에 수놓아진 붉은 꽃들과 그와 맞춘 것처럼 보이는 붉은 색 오비까지. 그에게 다가오는 그녀의 모습은 그가 상상했던 것 보다 더 아름답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미()를 담고 있었기 때문에,

 

 

오빠..-!”

 

 

그가 굳어있을 때 언제 다가온 것인지 그의 얼굴 위로 손을 들어 살살 흔들더니 그제야 움직이는 스가의 모습을 보고 배시시 웃으며 더워요? 라고 물어보는 그녀였다.

 

 

아니, 괜찮아. 그러면 갈까?”

!”

 

 

평소보다 더 밝게 웃으며 신나게 앞서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 웃다가도, 그녀의 모습을 계속 훔쳐보는 남자들을 알아채고는 표정을 살짝 굳히고선 그녀를 따라가, .

 

 

, 오빠?”

다칠지도 모르니까. 손잡고 걷는 거 싫어?”

...아니요..”

 

 

손을 가볍게 낚아채고선 그 손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스가의 행동에 화르륵, 얼굴이 붉어져 리아의 얼굴이 잔뜩 달아오르자 그런 리아의 모습에 웃으면서 손을 꼭 잡으며 그녀를 바라보는 스가였다. 물론, 주위의 남자들에겐 그 답지 않은 날 선 표정으로 경고를 하면서, 그렇게 두 사람의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

 

 

 

축제 시즌의 길거리는 많은 사람들과 음식들이 잔뜩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오빠 이건 뭐에요?”

링고 아메, 사과에 설탕 시럽을 묻혀서 굳힌 거야.”

 

 

마츠리가 처음인 리아가 눈 돌아가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은 스가였다. 손에 쥐어준 링고 아메를 빤히 바라보던 리아가 고개를 들어 그에게 묻자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워 그저 크게 웃을 수밖에 없는 스가였다. 그런 그를 보고 빤히 바라보자,

 

 

아니야, 귀여워서 그래 귀여워서.”

 

 

라는 스가의 말에 가볍게 손 부채질을 하면서 고개를 푹 숙이는 리아였다. 오빠는 정말로..그런 말……. 웅얼거리며 말하는 리아의 모습에 뺨을 한 번 쓸고 링고 아메를 들지 않은 손을 다시 잡아 그녀를 끌어당기는 스가였다. 아직 보지 못한 것이, 그리고 보여주지 못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

 

 

 

링고 아메를 시작으로 오징어 통구이, 타코야끼, 야끼소바, 초코 바나나를 파는 가게까지 다 돌고 난 두 사람에 손에 가득히 든 음식을 보고 결국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어디 앉아서 먹을까?”

 

 

비는 손이 없자 결국은 수많은 사람들을 뚫고선 한적한 공간을 찾아 자리를 찾아 어디서 챙겨온 것인지, 손수건을 품에서 꺼내 그녀가 앉을 자리 아래 깔아주며 맑게 웃음을 짓는 그였다.

 

 

여기 위에 앉아. 옷 더러워지니까.”

오빠 옷도 더러워질 텐데…….”

나는 괜찮으니까, 얼른. 얼른 먹고 더 구경하러 가야지. 아직 볼거리가 많은데 리아야?”

 

 

우물쭈물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리아의 팔을 당겨 자리에 앉히고선 손에 들고 있었던 음식을 차례대로 내려놓기 시작하는 스가였다. 그런 그를 따라 리아 역시 손에 들었던 음식을 하나하나 풀어 놓기 시작했다. 정리를 하고 나서 스가가 가장 먼저 집은 건,

 

 

리아야, -”

 

 

동글동글한 구() 위에 올라간 계란 토핑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만 같은 모양새로 놓여있는 그 타코야끼를 집어 리아에게 아, 하고 입을 벌리라는 스가의 장난스러운 말에 발갛게 달아 작게 입을 벌리는 리아였다. 작게 벌린 입안으로 쏙, 타코야끼를 넣어주고선 입술 가에 묻은 마요네즈까지 손가락으로 쓱, 닦아주자 오물거리며 타코야끼를 먹고 있던 리아의 두 뺨이 더 달아올랐다.

 

 

더워?”

 

 

뻔히 알면서 모르는 척,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고개만 푹 숙이고 타코야끼를 먹고선 살짝 고개를 들더니 눈동자를 도르륵 굴려가며 사 온 음식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달큰한 초콜릿이 가득 묻은 바나나였다.

 

 

오빠도 먹어요...”

 

 

조금은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바나나를 입가에 가져다주는 그녀의 행동에 웃으며 바나나를 베어물자 입 안에 잔뜩 퍼지는 달콤한 초코와 바나나가 섞인 맛에 우물거리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자 초코 바나나가 꽂혀있는 막대를 꼭 쥐더니,

 

 

오빠.”

?”

 

 

부드럽고 말캉한 무언가가, 사람의 온기보다 더 높은 온도의 무언가가, 가볍게 촉, 소리를 내며 스가의 입가에 닿았다 떨어졌다. 그가 놀라 고개를 돌리자, 가깝게 닿아있는, 붉다 못해 타올라, 제 오비 색과 비슷한 색을 띄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순간적으로

 

, 하고 가볍게 입술을 맞추고 떨어지고선 사 온 음식을 하나씩 먹기 시작했다.

 

 

리아야, 좀 먹어.”

 

 

아무렇지 않은 척, 이것저것 건넸지만, 이미 저질러 버려도 한참을 저질러 버려서,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어떻게 할지 몰라 하던 리아가 일어난 건 스가가 음식을 권했을 때였다.

 

 

, 오빠 저 잠깐만요..!”

 

 

발갛게 달은 얼굴을 감싸고선 화장실 쪽으로 달려가는 그녀의 모습에 가볍게 웃으며 타코야끼를 먹으면서도, 그녀에게 닿은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바로 달려갈 거리기도 했고, 그녀의 사촌오빠에게도 한 소리를 들은 터였다. 무슨 일이 있으면 가만히 두지 않을 거라고. 애초에 무슨 일이 있게도 만들지 않을 것이었지만, 다시금 그에게 경각심을 심어주는 세미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던 그였다. 한 오 분 뒤 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고 온 것인지 두 뺨에 물기를 묻힌 채 그에게 걸어오던 그녀를 보고 웃으며 손을 흔들자 고개만 푹 숙이고선 그에게 오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준 건, 역시 그녀의 연인인 스가와라였고.

 

 

더 먹을래? 아니면, 좀 더 돌아다닐까?”

 

 

사 온 음식은 꽤 많이 남아 있었지만 고개를 저으며 돌아다녀요. 라고 말을 건네는 리아의 모습에 웃으며 음식을 정리해 쓰레기통에 버리고선 그녀의 손을 잡고 다시 거리로 나가는 두 사람 이었다.

 

 

 

*

 

 

 

손을 잡고 걸어 다니는 스가와 리아. 선남선녀(善男善女)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 맞춰 입은 듯 비슷한 검은 유카타를 입고 돌아다니는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예쁘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걷던 그 때, 갑자기 밀려드는 사람들에 밀쳐져 서로 잡은 두 손이 미끄러져 놓치고 말았다. 순간적으로 놀라 멈춰버린 리아와 손에 느껴지던 온기가 사라져 놀라 두리번거리는 스가. 멀리까지는 밀리지 않아 급하게 그녀의 곁으로 가 손을 잡으려다가 팔을 올려 그녀를 품에 안다시피 어깨에 손을 올려 끌어안았다.

 

 

괜찮아?”

으응…….”

 

 

안 그래도 큰 눈이 크게 떠져 그를 바라보고 있는 탁하지도, 하염없이 영롱하지도 않은, 하지만 깊고 깊은, 그가 좋아하는 그녀의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놀란 것 같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그의 팔에 안겨 진정하는 모습이 그의 눈에 보이자 작게 한숨을 쉬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조금을 그러고 난 후, 마저 진정되었을 때, 생긋 웃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는 그의 손을 살짝 잡아주었다.

 

 

진짜 괜찮으니까, 우리 이제 구경 가요. ?”

괜찮아?”

그냥 좀 놀란 거뿐이고, 괜찮아요. 오빠가 바로 알아차려줬으니까. , 불꽃놀이 할 때 아니에요? 엄마가 타나바나 마츠리 불꽃놀이가 엄청 예쁘다고 하시던데...”

잘 보이고, 사람 없는 데가 있어. 거기로 가자.”

 

 

어깨에 올린 손을 풀지 않고 품에 안아 발걸음을 옮기는 스가와라와, 그의 품에 안긴 리아. 두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많은 거리를 지나-물론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은 여전했고, 그들의 스킨십에 대해 속닥이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한적한 오솔길 사이를 한참을 말없이, 두 사람 사이에 들리는 소리는 거리의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대화소리, 밤벌레가 울어대는 소리, 게다가 오솔길의 돌과 부딪혀 달그락 거리는 소리. 그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에 울려 퍼질 때 보이는 숲길의 끝이 있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불꽃놀이의 시작을 알리는 첫 폭죽 소리가 들려왔다.

 

 

, 시작 됐나봐.”

쫌 더 빨리 가요 오빠!”

 

 

불꽃놀이 소리에 살짝 신이 난 것인지 품에서 빠져나와 앞서 빠르게 걸어 나가다 휘청. 어두운 밤 길, 그것도 포장되지 않은 오솔길을 게다를 신은 발로 뛰다시피 걸어가는 그녀가 넘어지려는 것은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휘청이며 앞으로 고꾸라지는 그녀의 허리를 잡아채 안아들자 스가와라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리아 스텔리어의 놀란 얼굴이었다.

 

 

조심해야지.”

 

 

살짝 낮게 깔린 목소리. 그 이유는 아마도 그의 눈에 보이는 그녀의 얼굴 때문이었을 것이다. 붉게 상기된 두 뺨, 처음 봤을 때 보다 조금 흐트러진 머리카락, 불꽃놀이가 하늘을 수놓게 되면서 보이는 하늘의 아름다운 빛. 그리고 서로를 안고 있는 커플.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인영이 겹쳐졌다. 붉은 입술이 마주해 진한 입맞춤을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불꽃놀이의 붉고 푸른 불빛이 반사 빛이 머리카락에 반사되며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뜨거운 여름날 아름다운 커플의 그림 같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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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가랠 도장판 리퀘스트

 * TO. 내 하나뿐인 연인님 (@your_suga_r)

 

 













파르르 떨리는 길고 풍성한 금빛 속눈썹, 분홍빛으로 물든 눈가. 그 아래 물기로 젖어있는 에메랄드 빛 눈동자. 꾸욱- 누르면 과즙이 나올 것 같은 발갛게 달아오른 뺨. 체리를 머금은 것 같은 붉은 입술. 금에서 뽑아낸 것만 같은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을 땋아 틀어 올린 머리 위에 사뿐히 올라간 길고 얇은 흰색 베일. 그 아래를 따라 내려가면 순백색 웨딩드레스가 아래로 펼쳐져 있었다. 호텔 내부에 있는 정원. 6, 초여름의 그 중순의 아름다운 신부가, 설레고, 조금은 두려운 마음으로 부친의 손을 잡고서 신랑의 곁으로 갈 첫 걸음을 내딛었다.

 

 

 

 

W. Liell

 

 

 

 

사랑해, 영원을 함께 해 줘.

 

그 말을 듣기까지 자그마치 8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한 두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2학년 때 만나 27, 26살인 지금 그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사랑하는 이와 영원을 약속하는 식을 올리기 위한 고백.

 

대학 시절 자주 갔던 카페에 있는 피아노 위에 앉아서, 오로지 그녀만을 위한 세레나데를 연주하고, 무릎을 꿇고서 했던 고백.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눈물이 펑 하고 터져버려서 번져버린 눈 화장에 얼굴을 가리자 웃으면서 제 손을 다정하게 잡으면서 입 맞춰 준 그녀의 남자. 검정색 수트에 대조되는 맑은 회색의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제 눈앞을 스쳐 지나가자 히끅 거리면서도 살포시 눈을 감아 그가 좋아하는 에메랄드 빛 눈동자를 길고 빽빽한 속눈썹 사이로 숨기는 그녀였다.

 

길게 한 번 입 맞추고 나서도 울먹이는 그의 사랑의 입술에, 뺨에, 눈에, 코에.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고 나서 그가 좋아하는 양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위에도 입술을 살포시 가져가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고, 달콤하고. 그런 입맞춤을 한참. 살짝 입술을 떼어내고 나서 사랑해. 리아야. 속삭이며 말하는 그의 말에 또 다시 눈물이 흘러내리자 그런 그녀를 안아 올려 제 품에 안기게 하는 스가와라였다.

 

혹시..나랑 결혼하기 싫......?

 

우느라 대답하지 못했던 터라 제 청혼에 대한 대답을 우물쭈물 하면서 물어보는 그의 모습에 그제야 웃음이 터져 고개만 살며시 저으며, 결혼할래요. 라고 말하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입 꼬리를 살짝 올려 웃는 스가와라였다.

 

리아 스텔리어가 아니라, 스가와라 리아가 되어줘 내 별아.

 

속삭이며 말하는 그의 말에 발갛게 달아올라 품에 안겨 부비적거리는 그의 연인의 모습이 귀여웠는지 웃으며 품에 안아주는 스가와라였다. 스가와라 리아. 입 안에 잔뜩 울리는 그 이름이 눈물 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너무나도 달아 목에서 나오면 혀끝에서 언제 나왔냐는 듯이 살며시 녹아 없어질 것만 같은 이름. 꿈같은, 그런 이름.

 

제 연인, 제 사랑하는 연인.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위태로운 모습을 8년이라는 연애 도중 많이 봐 왔던 스가와라였다. 초반에는 사랑에 대해 두려워하던 그녀였다. 후에 그녀의 과거에 대해 알고 나서야 그 위태로움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연애 중반에는 부상이었다. 피아니스트에게는 치명적인 손목부상. 재활치료를 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막 날아올랐을 때 일어난 부상이라 더. 제게는 아무런 걱정을 시키지 않으려고 웃어 보였지만, 그 웃음조차 너무 슬퍼보였던 리아였다. 물론 후에 재활을 끝내고 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을 때의 그 웃음도 잊을 수 없는 웃음이기는 했었지만.

 

연애의 끝. 그 끝을 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였는지, 제 연인은 아마 모를 것이다. 얼마나 떨면서 그리고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이제는 충분하다던 제 친우-다이치나 아사히-들의 말에도 부족함을 느끼며 어디가 문제인 것인지 찾아 헤맸음을. 제 연인은 모를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물기를 머금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모습을 보면서, 그 눈물이 슬픔의 의미가 담긴 눈물이 아님을 알면서도.

 

울지 마 리아야, ?”

 

심장이 아려오는 것 같은 기분에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다독여주고, 품에 안아 더는 놓아주지 않겠다는 옅은 소유욕을 감추고 있는 그였다. 아아, 이 사람을 더 이상 놓지 않으리. 품에 안아 새장에 가두는 한이 있어도, 놓아주지 않으리. 어릴 적부터 품에 담아왔던 소유욕이 그 크기를 키우고, 또 키워 펑, 하고 터져버리기 전에 그녀를 품에 안았다. 놓아주지 않아. 결혼이라는 족쇄로 그녀의 발목을 잡고,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그녀의 손을 묶어 그의 품에서 놓아주지 않으리. 이런 감정은, 그녀에게만 국한되는 감정이었고, 그래서 더더욱 놓을 수 없는 사랑이었다.

 

 

*

 

그리고 결혼식 당일, 초여름의 하늘이 푸름을 자랑하는 그 날, 그의 작은 신부는 그의 옆에 섰다.

 

그녀의 부친, 그러니까 그의 장인어른 될 이의 손을 잡고 사뿐히 걸어오는 그의 작은 연인은 그가 봐 왔던 그 어떤 모습보다도 더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그에게 걸어오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호텔 내부에 위치한 정원에서 치러지는 예식이었기에 높은 굽을 신고서 푸른 잔디를 밟으며 걸어오는 그녀가 조금은 걱정이 되었지만, 그 보다도 더 그의 시선을 끄는 것은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였음을.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 외모와 햇빛 아래 반짝이는 머리카락. 본인 역시 투명한 회색빛 머리카락을 올려 단정하게 정리하고선 함께 갔던 웨딩숍에서 맞춘 흰색 턱시도를 입고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짧은 미니 드레스에서 점차 길어지는 웨딩드레스를 입고서 신부화장을 하고, 발끝까지 끌리는 베일로 그녀의 몸을 감싼 채로 그가 좋아하는 그 에메랄드 빛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며 천천히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은 정말로 한 폭의 그림과 같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

 

 

서로의 손을 마주잡고 서로를 영원히 사랑하겠다. 그렇게 선언하고 나서 돌아온 것은,

 

신랑 신부의 영원함을 위한 키스 타임이 있겠습니다.”

 

리아의 사촌 오빠인 세미가 사회를 봐준다고 했을 때부터 말렸어야 했었음을 다시 한 번 느끼는 스가와라였다. 장난스럽게 웃으며 두 사람에게 키스를 종용(?) 하는 세미의 행동에 발갛게 달아오른 리아의 얼굴이 스가와라의 눈에 보이자,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로 웃더니 베일을 걷어 올리고선 입술을 찾아 가볍게, 도장을 찍듯 여러 번 입을 맞추는 스가와라였다. 물론 그런 그의 행동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지 못하는 리아기도 했다.

 

가볍게 맞췄다 떨어진 입술을 보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약하다고 소리치는 리아의 친구들과 스가와라의 친구들. 그런 그들의 반응에 어쩔까 하다가 리아와 눈을 맞추자 금빛 속눈썹이 그 예쁜 에메랄드 빛 눈동자를 가리며 서서히 내려앉았다. 그런 리아의 모습에 웃으며 다시 한 번 입 맞추는 그였다. 앞서 한 키스와는 달리 그녀의 허리를 잡아 끌어당겨 그의 품에 안기게 하고선 깊고, 깊게 입을 맞추는 그였다.

 

혀와 혀가 얽히고 허리를 잡은 손끝이 뜨거워져 바르르 떨며 그의 품에 조금 더 밀착하는 리아를 품에 안고 조금 더 길게 입을 맞추고 떨어지자, 입술 사이로 늘어지는 은빛 실이 있었다. 그를 보고선 다시 한 번 짧게 입을 맞추고 촉-,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입술이었다. 조금은 긴 시간동안 입을 맞춘 탓인지 아까보다 붉어지고, 가쁜 숨을 내 뱉는 리아의 모습에 웃으며 그녀의 다리 사이에 손을 넣어 공주님 안기 자세로 그녀를 안아 올리는 그였다.

 

역시나 하염없이 가벼운 그녀를 보고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이자 붉어지다 못 해 조금만 더 건드렸다가는 터질 것만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리아였다. 그녀를 안아들자 마이크를 쥐고 있던 세미가 웃으며, 신랑 신부 퇴장을 외치고 그 말에 스가와라의 품에 안겨 버진로드를 지나가는 리아가 있었다. 그들 위로 흩뿌려지는 희고 붉은 장미꽃들이 그들의 아름다운 미래를 예언하는 것처럼, 아름답게 흩뿌려지고 있었다.

 









 * 당신의 수호천사

 * 219회 주제 : 같이 도망칠까?

 * 스가리아 대학생 AU




W. Liell




 누군가 그랬다.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 5월의 시작은 과제의 시작, 6월의 인사는 기말고사. 

5월이 들어서고 나서 과제에 잔뜩 치여 데이트는커녕 연락도 힘들어진 두 사람이 결국 최선의 방법으로 찾은 것은 도서관 데이트였다. 과제를 한 뭉텅이 들고 서로 피폐한 모습으로 마주했지만 웃음은커녕 서로에 대한 걱정만이 잔뜩 쌓여갈 수밖에 없는 몰골인지라 아무 말도 없이 서로를 안쓰럽게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오빠...좀 괜찮아요?”

 “...너는...?”




 그저 서로를 보며 애처롭게 웃을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이 너무나 웃기기는 했지만,




 “들어갈까?”

 “...네…….”




 지옥문으로 들어가는 기분으로 도서관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집 근처 작은 도서관이라 사람은 없어 단 둘이 있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단 둘이 있으면 뭐 할 것인가. 현실은 그냥 과제에 고통 받는 대학생 둘이었을 뿐. 산더미처럼 쌓인 책들 사이에 파묻혀 한참을 책을 뒤지며 자료를 찾는 리아와, 곧 있을 발표 대본을 짜기 시작하는 스가였다. 

 



 대본을 다 짜고 나서 약하게 기지개를 펴다 옆자리에 있는 고개를 꾸벅이며 졸고 있는 제 연인의 모습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어제도, 그제도. 조별과제만 네 개라 밤을 새서 과제를 하고 발표 준비를 했다고 듣기는 했는데, 아까 봤을 때도 다크서클이 그가 좋아하는 에메랄드 빛 눈동자 아래에 잔뜩 자리를 해. 좀처럼 속상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살짝, 리아를 깨워 엎드리게 하자 비몽사몽한 채로 엎드리는 리아의 고개를 따라 흩어지는 그녀의 금발이 그의 얼굴을 살짝 스쳐 간지럽게 하기도 잠깐, 추운 도서관 안에서 자다가 감기라도 걸릴까, 여분으로 가져온 겉옷을 꺼내 리아의 등 위로 덮어주는 스가였다. 




 체력도 약한 제 연인이 이틀 연속으로 밤을 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혹여나 제가 없는 곳에서 쓰러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분명히 제 연인의 전공은 피아노인데, 전공보다 교양 때문에 힘들어하는 모습은 아무래도 작년의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도 하면서도 또, 1학년에게만 뒤집어씌우는 것만 같아 약간의 분노가 일기도 했다. 




 토닥토닥, 제 연인의 등을 쓰다듬으며 같이 엎드려 제 연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푹 자고 일어나 그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 눈동자를 제게 보여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스가였다. 




 “일어나면, 우리 도망갈까 리아야?”

 “......”

 “과제하지 말고, 우리 둘만 있는 곳으로 도망가자 별아.” 




 장난기 가득 섞인 목소리로 새근새근 자고 있는 제 연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 어떤 말보다 달콤하게 속삭이는 스가와, 자고 있는 리아의 등 뒤로 반쯤 저물어가는 해가 만들어 낸 아름다운 그림의 한 폭이 완성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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