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의리 초코야!”

 

성 밸런타인데이 (St. Valentine's Day) 라는 소녀들의 고백 데이에 맞춰 진심으로 위장한 거짓과 거짓으로 위장한 진심이 넘쳐나는 날. 그 거짓과 진심이 섞인 고백은 카라스노 고등학교 3학년 4반에도 넘쳐나고 있었다. 스가와라 코시. 특히 그에게.

 

 

 

 

 

 

 

 

 

St. Valentine's Day

W. Liell

 

 

 

 

 

 

 

 

 

 

스가와라 코시. 카라스노 고등학교 3학년 4. 연한 머리카락과 짙은 눈동자. 상냥한 성격에 다정한 말씨. 그리고 우선적으로 미소년. 근처 학교인 아오바죠사이의 오이카와 토오루 보다는 아니었지만 카라스노 고등학교 내부에서는 남몰래 그를 좋아하는 소녀들이 많다는 것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밸런타인데이 전부터 스가와라 코시라는 이름은 소녀들의 입술 위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이름 중 하나였다. 그런 소녀들의 반응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함정이기는 했지만 말이었다.

 

어느 때처럼 연습을 끝내고 나면서 신나있는 히나타의 모습에 언제나처럼 그 상냥한 모습으로 이유를 묻자 방긋방긋 웃으며 말하는 히나타의 대답에 그제야 이 학교의 공기 중에 떠도는 단 내의 이유를 알게 된 스가와라였다.

 

오늘 밸런타인데이잖아요! 초콜릿 받았으면 좋겠다~”

, 꼬맹이를 누가 좋아한다고?”

히나타 의리 초코도 있으니까 걱정 마.”

밸런타인데이, 그게 뭡니까?”

 

가지각색의 대답과 말을 늘어놓는 1학년들의 모습은 번외 적으로 즐거워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입 꼬리가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스가와라였다. 달콤한 것 보다는 매운 것을 더 좋아하는 그였지만, 그녀가 그에게 준다면 그 어떤 것 보다 맛있으리라. 겨울의 끝이 다가왔기 때문일까, 그리 춥지는 않았지만 강도 높은 훈련이 진행되고 있었기에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탈탈 털며 교복으로 갈아입은 그가 같은 반인 다이치의 팔을 끌며 먼저 부실을 벗어날 때 까지 1학년들과, 뒤늦게 대화에 참여한 2학년들끼리의 만담 아닌 만담이 펼쳐져 있었다.

 

스가,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거 같네.”

밸런타인이니까?”

 

거짓말. 스가와라 코시의 감정 그래프는 이런 작은, 그리고 유치한 ~데이 같은 상술에 올라갈 정도로 예민하지 않았다. 그의 감정 그래프가 올라가는, 아니 정확히 말해서 이런 식으로 빠르게 올라가는 이유는 단 하나. 그도 소개받았던 그 작은 소녀 때문임을 사와무라 다이치가 모를 리가 없었다.

 

오늘 방과 후 연습, 없지?”

 

가게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카이 코치가 양해를 구하며 방과 후에 있는 주 연습을 빼고 자유연습을 주었음을 미리 전달 받았다는 사실은 주장과 부주장, 그러니까 사와무라 다이치와 스가와라 코시만 알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있을 연습 시간에 알려주는 것이 아무래도 낫다 생각하는 타케다 선생님의 의견에 동의하며 그 때 전달해도 크게 늦지 않음을 알기에.

 

, 끝나고 뭐라도 있어?”

데이트?”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는 스가와라의 웃음에 사와무라는 허, 하는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 익숙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스가와라 코우시의 저런 웃음. 그리 많이 짓지 않는 그 특유의 웃음. 저 웃음도, 그 작은 소녀 때문임을 사와무라 다이치는 모를 리가 없었다.

 

, . 알겠습니다. 부주장님.”

 

장난스럽게 받아치는 사와무라의 모습에 스가와라 역시 웃어넘기며 발걸음을 맞추며 단 내음이 진동하는 학교 건물로 향했다.

 

 

*

 

 

 

리아 스텔리어, 그러니까 스텔리어 가()에서 단 내음이 나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임을 다행으로 여기고선 난장판이 된 부엌을 바라보는 리아의 녹음을 담은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으로 부엌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가 향한 쪽은 붉은 하트모양의 적당한 크기의 상자. 이 난장판을 만들고 겨우 이뤄낸 소득 아닌 소득이었다.

 

한숨을 푹 내쉬고선 하트 모양의 상자를 들어 올려 흰 리본 끈으로 마무리를 하고 나서 부엌 바로 옆에 위치한 다이닝룸에 있는 테이블에 올려둔 그녀였다. 그 상태에서 몸을 돌리면 보이는 엉망이 된 부엌의 모습에 시선을 한 번, 다이닝룸 내부에 있는 시계를 한 번. 평소 같았으면 주위에 있는 메이드에게 도움을 청하면 되었지만 오늘, 부엌을 이렇게 만든 것은 정말 개인적인 자신의 상황 때문이었기에 도움을 청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도움을 청할 만큼 그녀가 양심이 없지도 않았다.

 

양심을 운운할 정도로 더러운 부엌의 모습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다시 한 번 묶고선 비장한 발걸음으로 그녀가 부엌으로 향한 시간은 130. 상자의 주인이 학교에서 끝나는 시간은 330. 정리를 하고, 준비를 하고, 그가 있는 곳으로 향해야 할 시간까지, 2시간이 남은 시간이었다.

 

 

*

 

 

연습이 끝나고 나서 교실에 들어가면, 보이는 건 분홍색을 필두로 여러 포장지로 쌓여있는 초콜릿들 그리고 그를 기다리는 초콜릿들. 의리 초코야, 라고 말하는 여학생이 있나 하면 스가와라, 그를 따로 불러내려는 여학생들까지. 그런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는 사와무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앞으로 밀려오는 의리 초코라던지, 따로 불러내는 목소리라던 지.

 

 

 

*

 

 

 

여기.”

얼굴이 붉어진 상태로 그에게 불쑥 내밀어지는 흰색 박스에 붉은 리본. 어떤 의미로 건네주는지 알 것만 같은 상황에 스가와라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교실 밖으로 불러진 상태로 이미 건물 밖으로 나온 상태. 점심시간 연습이 끝나고 나서 끌려 온 터라 살짝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찬 겨울바람 위로 흩날리고 있었다.

 

저기, 미안한데.”

좋아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건네져 온 고백 한마디. 얼굴이 잔뜩 붉어진 상태로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목소리로 그에게 건네는 목소리가 덜덜 떨려감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게 그에게 고백해 오는 목소리를 듣고 있는 그였다.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점심시간이 금방이라도 끝나가는 시간.

 

미안.”

 

차분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거절의 목소리를 내는 그의 입술은 딱 그 한 단어를 말했을 뿐, 더도, 덜도 없었다. 추가적인 설명이라던 지, 그녀의 고백을 거절하는 이유라던 지. 그런 건 전혀.

 

, 저기 그러면.”

 

그 이유를 묻기 위해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을 때, 귓가를 울리는 점심시간이 끝나가는 종소리. 그 소리를 듣고 스가와라는 가볍게, 그렇지만 한 없이 가볍지는 않게. 그렇게 뒤돌아섰다. 질문을 끝까지 듣지 않아도 물어보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았을 터. 하지만 그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그에게 고백한 그 소녀만이 서 있었을 뿐.

 

 

*

 

 

점심시간에 이치노세 하루카가 스가와라 코시에게 의리 초코가 아닌, 진심이 담긴 초코를 주었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카라스노 고교에서 예쁘기로 나름 소문난 이치노세 하루카를 찬 남자, 라는 말로 사와무라가 스가와라를 놀리자 가볍게 그를 바라보면서 싱긋, 하고 청량한 웃음을 지을 뿐, 스가와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와무라 뿐만이 아니라 5교시가 끝나고 나서 배구부 후배인 타나카와 니시노야가 뛰어와선

 

스가와라상!!!! 고백 받았는데 거절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라는 작은 소동을 부렸던 것을 빼면, 나름 순탄하게 오후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지나가는 시간 동안 스가와라는 계속해서 핸드폰만을 확인하고 있었을 뿐, 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다만, 매 쉬는 시간마다 한, 두 명의 학생들에게 의리 초코를 받거나, 진심 초코를 주며 고백하려는 여학생들의 부름에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 그리고 그 진심 초코를 손에 들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소문이 되어 학교 내부를 돌고 있었다.

 

 

*

 

 

 

백금색 머리카락은 웨이브를 만들며 등 위에서 탄력 있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녀의 이마를 사뿐히 가린 앞머리는 그녀의 이마를 살랑이며 간지럽히고 있었다. 아래로 갈수록 옅어지는 머리카락 위로 빨간색 체크무늬 베레모와 함께 채우지 않은 검은 코트. 그 아래로 보이는 붉은 체크무늬 치마가 한 세트인지 단정한 모습의 리아가 카라스노 고등학교 교문 앞에 도착한 것은 수업 시간이 끝나기 바로 5분 전. 그러니까 325분이었다. 급하게 차려입은 것 치고는 나름 괜찮지, 하면서 나온 그녀의 모습은 생각보다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

 

 

수업이 끝나고 교문 앞에 서 있는 리아의 모습에 학생들이 웅성거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작은 프랑스 인형같이 생긴 작은 소녀가-그것도 처음 보는, 그리고 고백할 것처럼 붉은색 상자를 들고-서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웅성거림 속, 작게 미소 짓는 한 소년이 있었다.

 

각자의 종례가 끝나고 교문 앞 작은 소녀에게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백금발과 연녹색 눈동자. 에메랄드를 박아 넣은 것만 같은 그 눈동자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어색하게 웃으면서도 살짝은 겁에 질린 것만 같은 눈동자가 한참을 흔들릴 때 쯤 어떤 한 소녀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누구 기다려?”

일본인처럼 생긴 외모는 아니었기에, 영어로 물어본 질문에 자신을 배려하는 질문이라는 걸 알고선 리아는 생긋, 예쁘게 웃으며 일본어로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들려오는 한 남자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그녀에게 질문한 소녀는 표정을 일그러트렸고, 맑게 웃으며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뛰어 안기는 그녀의 모습과,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시선이 몰렸을 때, 주위의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리아야.”

오빠!”

 

 

그러니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녀에게 말을 건 소녀-이치노세 하루카-의 고백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고백을 거절한 주인공인 스가와라 코시였으니까.

 

 

*

 

품에 안겨온 리아에게서 붉은 상자를 받아 들고 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는 스가와라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진 건 순간이었다. 주위를 돌아보다가 품에 안긴 리아가 살짝 꼬물거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상큼한 웃음을 지으며 리아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부끄러워하며 붉어진 얼굴을 가리는 리아와, 동시에 짙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주위를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기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 짙은 눈빛에 그들의 주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사와무라의 입술에서 깊은 한숨이 나오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런 그의 모습을 알 수 없었다. 단 한 사람, 스가와라 코시를 제외하곤.

 

 

*

 

 

자리를 옮겨 작은 카페에 앉아 리아에게서 받은 초콜릿을 열어보자 아기자기한 하트 모양의 초콜릿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었다. 그런 모습에 씩, 웃어 보이는 스가와라의 모습에 일단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직접..만든거라..맛은 장담 못하지만..”

 

말을 줄이는 그녀의 모습에 씩 웃으며 내려다 본 초콜릿은 직접 만든 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완벽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단 한 가지 모양만 빼고.

 

리아야, 근데 이건 뭐야?”

 

갈색 초콜릿 위에 주황색 선과, 초록색 선으로 무엇인가가 그려져 있는 것 같은 모양. 어디서 많이 본 모양임에도 불구하고 팍, 떠오르지 않자 결국 질문한 스가와라의 모습에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리아였다.

 

..배구..배구공이에요..모양..이상하죠..노력은 해 봤는데..영 아닌 거 같아서..”

 

역시 빼는 것이 가장 나았을 것이었다. 넣을까 말까, 제일 많이 고민했던 초콜릿이었다. 뭔가 의미 있는 초콜릿 모양을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그게 그녀 마음대로 되지 않아 결국 실패 아닌 실패를 해 버린 초콜릿이었기 때문에 끝까지 고민을 하다 결국 넣은 초콜릿이었는데.

 

맛있다, 리아야.”

 

그가 그 초콜릿을 제일 먼저 입안에 넣고 우물우물 씹을 것이라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그가 그 초콜릿을 먹었을 때 리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뻐, 마음에 들어. 누가 만들어 준 초콜릿인데. 너 마음만으로도 충분해. 못생기지 않았어. 모양이 이상하지도 않아. 이 모든 말을 축약해서 스가와라가 말한 것은 저 한마디였다. 상냥하게 다 말해주기는 싫었다. 그냥, 그냥 그녀가 그를 위해서 해 줬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표현하지 않는 것은 그의 취향에는 맞지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울먹일 것만 같은 그녀의 모습에 가장 먼저 튀어나온 말은 바로 그것이었다.

 

진짜요?”

 

초콜릿 안에 오렌지 시럽을 넣은 것인지 달달한 초콜릿과 상큼한 오렌지 향이 어울려져 스가와라의 입 안을 맴돌고 있었다.

 

, 진짜.”

 

믿지 못하는 것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보는 모습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몸을 일으켜 그녀의 옆으로 다가갈 때 까지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그였다. 눈꼬리를 살짝, 눈웃음을 살짝. 사랑스러운 그녀의 입술에 아주 가볍게.

 

*

 

 

리아 스텔리어는 알지 못했다. 스가와라 코시는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리아 스텔리어의 입술은 미치도록 달디 단 초콜릿과 같았고, 스가와라 코시는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과는 모순되게 리아 스텔리어에게 건네는 가벼운 키스를 제일 좋아했다.

 

 

*

 

 

그런 커플들의 모습을 축복이라도 하는 듯, 하늘에선 흰 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성 밸런타인데이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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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아 스텔리어가 스가와라 코우시를 처음 만난 날은 그녀의 사촌 오빠인 세미 에이타와 그녀가 다니는 시라토리자와 학원이 전국에 진출한 날이었다. 경기장 외부에서 길을 잃은 그녀를 발견하고 그가 길을 알려준 날운명처럼 리아 스텔리어는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반해버렸다. 우연이 필연이 되었고 필연이 운명이 되는 사랑을 리아 스텔리어는 두렵지 만 혼자서 시작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그의 고백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빗방울 전주곡

W. Liell

 

 

 

 

 "좋아해요."

 

 

 

 어색한 존댓말과 어색한 웃음. 이 상황이 어색한 것인지 머리를 긁적이는 그의 하얗고 예쁘게 곧게 뻗은 손가락. 하지만 그녀가 항상 예쁘다고 생각했던 고동색 눈동자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그의 곧은 목소리를 입 밖으로 내뱉었다. 맑고 투명한 목소리로 무섭도록 아름다운 유혹을.  그의 그런 모습에 리아, 그녀의 짙은 에메랄드를 박아 넣은 것만 같은 녹음(綠陰)을 담은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아얼마나 바래왔던 목소이었는가.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가.  달콤한 목소리로 아주 사랑스럽게 그녀를 바라보며 설레는 표정을 짓고. 하지만 리아 스텔리어는 두려웠다. 몸이 덜덜 떨려왔다. 상냥하게 불어오는 초여름의 바람은 오랜만에 찾아온 열기를 날려버리는데도 상쾌하다는 느낌 보다는 찬물을 뒤집어 쓴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오싹함

 

 

 "리아양?"

 

 

 어색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 점점 그녀의 두 눈에 박혀있는 보석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덜덜 떨려오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조금은 당황한 듯 웃으며 그녀의 눈가로 손을 가져다대는 스가와라의 손길을 피한 건 그 때 였다.

 

 

 "죄송합니다. 못 들은 걸로 할게요."

 

 

 무언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몸을 돌려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모습에 당황해 쫓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스가와라는 멍하니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 토옥

 

 

 멍하니 굳어버린 그의 얼굴에 차갑게 떨어지는 무언가에 정신을 차린 스가와라가 멍하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비가 오네."

 

 

 

 

 

*

 

 

 

 

 

 "리아요? 리아 아파서 안 나왔는데요."

 

 

 그녀가 결석한지도 벌써 3일째였다. 감기라고 했다. 그렇게 뛰어가는 그녀를 잡지 못한 스가와라가 결국 찾아온 곳은 그녀가 다니고 있는 시라토리자와 학원. 무리를 해서 연습을 빠지고서 그가 향한 곳은 이 시라토리자와 학원이었다. 교문 밖으로 나오는 학생들을 잡아서 눈으로 그녀를 찾다 익숙한 얼굴의 한 소년을 발견하고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카와니시 타이치. 시라토리자와의 미들 블로커이자 리아, 그녀와 같은 반 학생이라고 들었던 소년그와 마주하고 물으니 돌아온 대답은 아프다, 였다.  익숙하게 리아라고 말하는 그 소년의 모습에 불쾌함 보다는 부러움이 더 먼저 드는 것도 찰나. 아프다는 말에 사색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날의 고백이 그녀를 아프게 한 것일까.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생각을 끊은 것은 카와니시였다.

 

 

 "리아 문병 가시려고요집 주소 알려드릴게요."

 

 

 같이 건네 오는 쪽지에는 그녀의 집 주소가 적혀 있었고 그런 그의 쪽지를 받아들고 스가와라 코우시는 뛸 수밖에 없었다고맙다는 말조차 하지 않고 달려가는 스가와라의 모습에 카와니시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

 

 

 

 

 

 문을 두드릴까, 아니면 전화를 할까. 뛰어가면서 한참을 한 고민삼일 전 부터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은 어제 아침 기상예보에서 말하던 장마의 시작이었던 것인지 살짝 달아오른 대기를 빗방울이 차게 식히고 있었다. 스가와라의 은회색 머리카락 위에도 쏟아져 내리는 물방울은 상관도 없이 뛰어간 쪽지에 쓰인 주소.

 

 그가 마주한 집 앞은 평범한 집은 아니었다. 흰 철제 대문과 장미 넝쿨로 둘러싸인 담장. 대문 너머 보이는 흰색의 건물순간적으로 흠칫할 수밖에 없는 소리가 들려오는 건 그 때였다

 

 

 쇼팽의 피아노 전주곡 제 15번 빗방울 전주곡. 음악에 대해 큰 관심이 없는 그가 이 노래를 아는 이유는 리아, 그녀 때문이었다빗소리와 함께 그의 귀를 자극하는 그 노래를 듣는 순간 스가와라는 가만히 대문 앞에 서서 그 노래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톡, 톡 떨어질 때 마다 점점 강약을 조절하며 커지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푹 내쉬는 그였다. 가만히, 아주 가만히 듣던 중에 감정이 극대화되어 크게 내리치는 부분이 그의 귀에 들려오자 무슨 생각인지 모르게 스가와라 코우시는 핸드폰을 들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고백 이후 처음으로 거는 연락이었다.

 

 뚜르르-

 

 초조한 마음으로 대답이 들려오기를 바라는 순간 그의 귀에 들려오던 피아노 소리가 멈추고선 작은, 아주 작은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아주 작아서 그 누군가 들어도 그저 지나가는 사람의 목소리라고 생각할 만한 그런 목소리하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리아였기 때문에 스가와라 코우시는 그녀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간절했다. 부디 제발 받아주기를

 

 

 

 

 

*

 

 

 

 

 

 "아가씨 밖에 누가 있는데요."

 "? 누구요?"

 "누군지는 잘 모르겠어요... 은회색머리색의 남자분이시던데 검정색 교복을 입고 있으셔서 혹시 아가씨 친구 분이신가 해서요."

 

 

 직감적으로 그라는 걸 알았다. 검정 교복에 은회색머리. 근데 그가 여길 어떻게. 의문이 의문을 타고 흘러갔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의아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는 고용인에게 아니라고 말을 하려던 찰나 울리는 핸드폰과 그 핸드폰에 뜨는 '스가와라 코우시' 라는 이름.  몸을 일으켜 열려있는 연습실 창문으로 뛰쳐나갔다. 발끝에 닫는 잔디의 축축함도 인지하지 못하고선 대문까지 한달음에 달려가는 그녀였다.

 

대문 앞, 기대어 서 있는 그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무 말 없이 대문에 기대어 섰다. 등 뒤로 느껴지는 철제 대문의 찬 기운이 그녀의 몸을 타고 으슬으슬하게 올라왔다. 그렇지만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기대어 서 그가 알아채기를, 하지만 알아채지 않기를 바라며 그렇게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바람을 안 것인지, 아니면 알지 못한 것인지 그, 그러니까 스가와라 코우시는 그녀의 인기척을 빠르게 알아챘다.

 

몸은 좀, 괜찮아요?”

 

울컥. 다정한 목소리에 눈물이 차올랐다. 쏟아지는 빗물을 맞으면서 리아가 아무 말도 없자 가볍게, 하지만 깊게 웃으며 계속에서 다정한 목소리를 쏟아내는 스가와라의 목소리는 리아, 그녀의 눈물을 쏟아내게 할 정도의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덜덜 떨려오는 몸은 너무나 추워서인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감정을 그녀가 제어하지 못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울고 있는 걸 들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아프다고, 아니 학교에 찾아갔는데 아프다고 들어서 실례인건 알지만 이렇게 찾아와버렸어요.”

 

다정한 사람. 그녀가 사랑하는 저 남자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 그 상냥함은 리아, 그녀에게는 독과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모두에게 상냥하고, 다정한 그 모습은 그녀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었고, 그래서 더 무서웠다. 그저, 그가 느끼는 좋아한다는 감정은 그녀와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고, 관계의 깨어짐이 두려웠다. 그저 지금까지 그와 있었던 관계. 친한 오빠, 동생. 조금은 어색한 사이지만 그래도 매일 연락을 하고 지내는 두 사람의 사이가 발전한다고 하면 그 끝을 먼저 생각하고 있는 본인의 모습. 모든 것이 두려웠다. 겁이 많은 그녀였다. 좋아한다고 생각한 사람과의 끝을 생각하고 있는 그녀 스스로의 몸이 떨려오자 결국 주저앉아버리는 그녀였다.

 

아픈 건 좀 괜찮아요? 얼굴 보고 싶은데, 안 보여줄 거 같아서.”

눈물이 밀려왔다. 눈가에 흐르고 있는 것이, 얼굴에 흐르고 있는 것이 눈물인지 빗물인지는 아무도 모를 것 이었다. 눈물이 흐르고 빗물이 흐르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그녀도 마찬가지라고. 그녀도 그를 좋아하고 있다고.

 

괜찮았으면 좋겠어요. 가 볼게요. 다음에는 얼굴,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기대고 서 있었던 탓에 끼익, 하는 소리가 들리고선 발걸음이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뛰어가서 잡을 수 없어, 그렇게 리아 스텔리어는 눈물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

 

 

 

 

등 뒤로 느껴지는 인기척에 머리를 한 번 털었다. 축 젖은 머리카락이 그의 고동색 눈동자를 가렸다. 입술을 열고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몸을 일으켜 그 자리를 떠났다. 그녀가 무슨 연유로 자신의 고백을 거절한 것인지, 그를 피하는 것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스가와라 코우시는 욕심이 났다. 욕심. 리아 스텔리어를 향한 욕심. 절대 포기하지 않으리,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초여름의 비는 그의 그런 다짐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계속해서 쏟아져 내렸다.

 

장마의 시작이었고, 감정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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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tOxVFHEpzyA





 주화원(珠花園). 조선 내의 유명한 기생집의 이름이었다. 보석 꽃이 있는 동산 이라는 이름 답게 아름답기로 소문난 기생들이 많은 곳. 그 곳은 그런 곳이었다. 외모만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가야금이면 가야금, 춤이면 춤, 뭐든 빠지지 않는 기녀들만 존재하는 곳. 그들이 파는 것은 웃음이 아니었다. 그들이 파는 것은 기예(技藝)였을 뿐. 그리고 주화원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아는 이름 하나. 화영(華榮)

 그녀의 원래 이름은 장화영(張花榮). 꽃 같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지어준 이름은 집안이 몰락하고 나서 화영(華英)-아직 피지 못한 꽃 봉우리-이라는 기명(妓名)으로 변모하여 그녀의 곁에 남아 그녀를 칭하는 이름이 되었다. 화영, 그녀는 남들보다 밝은 머리색을 가지고 있었고, 남들보다 밝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미모는 그 누구보다 뛰어났고, 그녀의 기예도 그 누구보다 뛰어났다.

 

 몰락한 양반가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양반가의 여식. 그녀는 똑똑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그녀가 어릴 적 배운 모든 것들을 써먹을 수 있었다. 그녀는 주화원의 명기(名妓)였다.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고, 주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단 한 번도 웃음을 팔지 않았고, 몸을, 그리고 마음을 내주지 않았다. 머리를 올리지 않은 기녀. 그 이가 바로 화영, 그녀였다.

 

 하지만, 운명의 실타래는 언제나처럼 굴러갔다. 그녀의 손가락 끝, 보이지 않은 붉은 실이, 이미 그녀의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紅連

W. Liell

 

 

 

 

 

 

 화영(華榮), 그녀가 가장 잘 하는 것은 가야금을 타는 것. 음률(音律)에 유독 뛰어난 그녀의 특기이자 장기였다. 몸을 팔지 않고 기예를 파는 주화원의 이름에 가장 알맞은 그녀의 재능은 매일 밤, 사람들을 주화원으로 부르는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나 화영의 가야금이었다. 매일 연주하지는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연주한다 소문이 난 날이 될 때마다 주화원의 방은 사람들로 가득차고는 했다. 주화원 안에 있는 방이 아닌, 주화원 내부에 있는 월화루(月花樓), 그 위에 한 떨기 꽃처럼 그렇게 그녀는 혼자서 색색의 노래를 수놓는 일을 했다. 그녀의 연주를 들을 때 마다, 지체 높은 양반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거나, 어미 잃은 아이처럼 엉엉 울곤 했다.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그들이 누구와 있던지 간에 인간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자극하는 그녀의 연주에 사람들은 감정을 그대로, 본능적으로 보이곤 했다.

 

 그리고 친우인 대훈(大勛)을 따라 간 주화원에서 운명처럼 그 노래를 들은 것은, 조선에서 소문난 좌상의 아들, 지효(支孝)였다.

 

 장난기가 많지만 친절하고, 친절하지만 냉철하고, 냉철하지만 따스한. 문관이지만 무관의 자질도 가지고 있는 남가(南家)의 둘째 아들은 조선에서 녹을 먹는 이들에게는 한 번 쯤은 들어본 이름이었다. 성균관에서 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고, 무술 실력도 뛰어난 그가 제 아비를 따라 훌륭한 관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그 모두가 믿어 의심치 않는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여기는 기방(妓房)이 아닌가, 내 이런 곳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지 않는가?”

 “평범한 기방이 아니니 친우께서 데려오신 것이 아닙니까. 오늘은 또, 저희 주화원(珠花園)의 꽃이 노래를 수놓는 날인데, 선비께서는 좋은 벗을 두셨군요.”

 

 

 

 화려한 옷을 입고, 희게 분칠을 하고, 붉디붉은 입술을 바르고, 하지만 한 없이 아름다울 뿐, 천박하지 않은 여성이 그의 곁에 앉아 술을 건네자 한숨을 푹 내쉬는 지효의 모습을 보는 대훈이었다. 제 친우가 이런 곳을 그리 즐기지 않는다는 걸 수 없이 많이 본 그로선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 화영(華榮)이 노래를 하는 날이라 했다. 이런 기방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부친조차도 그 화영의 노래를 듣기 위해 가끔씩 이곳을 찾는다 했으니, 한 번쯤은 나쁘지 않다. 라는 생각으로 지효를 끌고 온 대훈이었던 것이었다. 음률(音律)을 즐기는 지효였으니 더더욱.

 

 

 “그래서 언제 이 주화원의 못다 핀 꽃 한 송이가 노래를 수놓는 건가?”

 “지금은 유시(酉時)의 끝이고, 화영, 그 아이가 노래를 시작하는 시간은 술시(戌時)이니 곧 아이가 누각 위로 오를 것입니다. 그러니 선비님들은 조금 더 풍류에 취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풍류는 그 꽃이 살려줄 것이고, 술이나 더 따라주게. 저 친구에게도 더 따라주고.”

 

 

 유난히 기분이 좋아 보이는 대훈의 행동에 지효는 한숨을 푹 쉬고선 제 앞에 있는 술잔만 들고 마실 뿐이었다. 봄 향기 가득한 술 맛을 찬찬히 음미하던 그의 곁으로 다가온 기녀 하나가 그의 옆에 있던 창을 열자 남색으로 바뀐 하늘 위를 살랑거리며 수놓는 벚꽃 잎이 만개하고, 그리고 그의 눈에 믿을 수 없는 인형(人形)이 보였다.

 

 갈색? 아니, 저건 틀림없이 금()의 색을 띄고 있었다. 머리를 수놓는 아름다운 금사(金絲)인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의 눈에 비춘 것은 틀림없는 금색의 머리카락이었다. 색색의 보석으로 장식한 머리를 틀어 올리고, 벚꽃(櫻花)의 꽃잎을 닮은 저고리를 그리고 치마를 입은 한 소녀? 여인?

 

 

 “벌써, 술시(戌時)가 다 되었나 보군요. 저희 주화원의 꽃인 화영이라는 아이랍니다. 선비님께서는 벌써 그 아이의 미모에 현혹 되신 것 같아 보이는군요.”

 “.......?”

 

 

 멀리서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달빛이 차오르는 그 모습에, 그리고 처음으로 튕기는 가야금의 맑은 소리에, 한 없이 아름다운 자태가, 그녀의 모든 모습이 지효, 그의 모든 시선을 잡아 당겼다.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공기를 타고 흐르는 아련한 떨림. 금방이라도 파드득 떨어질 것만 같은 눈물 섞인 음률. 서서히 젖어드는 공기와 아득히 멀어지는 것 같은 감각. 심장 한 켠, 아려오는 느낌. 점점 들려오는 음률에 금방이라도 헤어 나오지 못할 것만 같으면서도, 지효의 시선은 그저 한 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벚꽃을 닮은 그 소녀.

 

 그리고 서서히 잦아드는 노랫소리와, 차분히 잦아드는 감정의 휘몰아침, 그리고 그 때서야 마주한, 호수, 그러니까 월화루(月花樓) 아래 있는 월호(月湖)에 비추어 더더욱 아름다운 자태는 그의 시선을 잡아둘 수밖에 없는 천상(天上)의 미() 였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은 아련함을 담은 짙은 녹색의 눈동자가, 지효의 갈색 눈동자와 마주했을 때, 그래 그들은 운명적으로 그들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들은 전생의 연이 닿아, 월하(月下)노인이 이어준 붉은 실을, 그들의 손가락 끝에 매달고서 그들을 찾아 헤매어 이제야 마주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인연이, 그 붉은 실이 준 홍연(紅聯)의 끝이 그리, 아름답지 않을 것이라는 것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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