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의리 초코야!”
성 밸런타인데이 (St. Valentine's Day) 라는 소녀들의 고백 데이에 맞춰 진심으로 위장한 거짓과 거짓으로 위장한 진심이 넘쳐나는 날. 그 거짓과 진심이 섞인 고백은 카라스노 고등학교 3학년 4반에도 넘쳐나고 있었다. 스가와라 코시. 특히 그에게.
St. Valentine's Day
W. Liell
스가와라 코시. 카라스노 고등학교 3학년 4반. 연한 머리카락과 짙은 눈동자. 상냥한 성격에 다정한 말씨. 그리고 우선적으로 미소년. 근처 학교인 아오바죠사이의 오이카와 토오루 보다는 아니었지만 카라스노 고등학교 내부에서는 남몰래 그를 좋아하는 소녀들이 많다는 것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밸런타인데이 전부터 ‘스가와라 코시’ 라는 이름은 소녀들의 입술 위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이름 중 하나였다. 그런 소녀들의 반응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함정이기는 했지만 말이었다.
어느 때처럼 연습을 끝내고 나면서 신나있는 히나타의 모습에 언제나처럼 그 상냥한 모습으로 이유를 묻자 방긋방긋 웃으며 말하는 히나타의 대답에 그제야 이 학교의 공기 중에 떠도는 단 내의 이유를 알게 된 스가와라였다.
“오늘 밸런타인데이잖아요! 초콜릿 받았으면 좋겠다~”
“하, 꼬맹이를 누가 좋아한다고?”
“히나타 의리 초코도 있으니까 걱정 마.”
“밸런타인데이, 그게 뭡니까?”
가지각색의 대답과 말을 늘어놓는 1학년들의 모습은 번외 적으로 즐거워 보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입 꼬리가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스가와라였다. 달콤한 것 보다는 매운 것을 더 좋아하는 그였지만, 그녀가 그에게 준다면 그 어떤 것 보다 맛있으리라. 겨울의 끝이 다가왔기 때문일까, 그리 춥지는 않았지만 강도 높은 훈련이 진행되고 있었기에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탈탈 털며 교복으로 갈아입은 그가 같은 반인 다이치의 팔을 끌며 먼저 부실을 벗어날 때 까지 1학년들과, 뒤늦게 대화에 참여한 2학년들끼리의 만담 아닌 만담이 펼쳐져 있었다.
“스가,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거 같네.”
“밸런타인이니까?”
거짓말. 스가와라 코시의 감정 그래프는 이런 작은, 그리고 유치한 ~데이 같은 상술에 올라갈 정도로 예민하지 않았다. 그의 감정 그래프가 올라가는, 아니 정확히 말해서 이런 식으로 빠르게 올라가는 이유는 단 하나. 그도 소개받았던 그 작은 소녀 때문임을 사와무라 다이치가 모를 리가 없었다.
“오늘 방과 후 연습, 없지?”
가게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카이 코치가 양해를 구하며 방과 후에 있는 주 연습을 빼고 자유연습을 주었음을 미리 전달 받았다는 사실은 주장과 부주장, 그러니까 사와무라 다이치와 스가와라 코시만 알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있을 연습 시간에 알려주는 것이 아무래도 낫다 생각하는 타케다 선생님의 의견에 동의하며 그 때 전달해도 크게 늦지 않음을 알기에.
“왜, 끝나고 뭐라도 있어?”
“데이트?”
장난스럽게 웃어 보이는 스가와라의 웃음에 사와무라는 허, 하는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참, 익숙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스가와라 코우시의 저런 웃음. 그리 많이 짓지 않는 그 특유의 웃음. 저 웃음도, 그 작은 소녀 때문임을 사와무라 다이치는 모를 리가 없었다.
“네, 네. 알겠습니다. 부주장님.”
장난스럽게 받아치는 사와무라의 모습에 스가와라 역시 웃어넘기며 발걸음을 맞추며 단 내음이 진동하는 학교 건물로 향했다.
*
리아 스텔리어, 그러니까 스텔리어 가(家)에서 단 내음이 나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학교에 가지 않는 날임을 다행으로 여기고선 난장판이 된 부엌을 바라보는 리아의 녹음을 담은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으로 부엌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가 향한 쪽은 붉은 하트모양의 적당한 크기의 상자. 이 난장판을 만들고 겨우 이뤄낸 소득 아닌 소득이었다.
한숨을 푹 내쉬고선 하트 모양의 상자를 들어 올려 흰 리본 끈으로 마무리를 하고 나서 부엌 바로 옆에 위치한 다이닝룸에 있는 테이블에 올려둔 그녀였다. 그 상태에서 몸을 돌리면 보이는 엉망이 된 부엌의 모습에 시선을 한 번, 다이닝룸 내부에 있는 시계를 한 번. 평소 같았으면 주위에 있는 메이드에게 도움을 청하면 되었지만 오늘, 부엌을 이렇게 만든 것은 정말 개인적인 자신의 상황 때문이었기에 도움을 청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도움을 청할 만큼 그녀가 양심이 없지도 않았다.
양심을 운운할 정도로 더러운 부엌의 모습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다시 한 번 묶고선 비장한 발걸음으로 그녀가 부엌으로 향한 시간은 1시 30분. 상자의 주인이 학교에서 끝나는 시간은 3시 30분. 정리를 하고, 준비를 하고, 그가 있는 곳으로 향해야 할 시간까지, 딱 2시간이 남은 시간이었다.
*
연습이 끝나고 나서 교실에 들어가면, 보이는 건 분홍색을 필두로 여러 포장지로 쌓여있는 초콜릿들 그리고 그를 기다리는 초콜릿들. 의리 초코야, 라고 말하는 여학생이 있나 하면 스가와라, 그를 따로 불러내려는 여학생들까지. 그런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는 사와무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앞으로 밀려오는 의리 초코라던지, 따로 불러내는 목소리라던 지.
*
“여기.”
얼굴이 붉어진 상태로 그에게 불쑥 내밀어지는 흰색 박스에 붉은 리본. 어떤 의미로 건네주는지 알 것만 같은 상황에 스가와라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교실 밖으로 불러진 상태로 이미 건물 밖으로 나온 상태. 점심시간 연습이 끝나고 나서 끌려 온 터라 살짝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찬 겨울바람 위로 흩날리고 있었다.
“저기, 미안한데.”
“좋아해.”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건네져 온 고백 한마디. 얼굴이 잔뜩 붉어진 상태로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목소리로 그에게 건네는 목소리가 덜덜 떨려감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게 그에게 고백해 오는 목소리를 듣고 있는 그였다.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점심시간이 금방이라도 끝나가는 시간.
“미안.”
차분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거절의 목소리를 내는 그의 입술은 딱 그 한 단어를 말했을 뿐, 더도, 덜도 없었다. 추가적인 설명이라던 지, 그녀의 고백을 거절하는 이유라던 지. 그런 건 전혀.
“저, 저기 그러면.”
그 이유를 묻기 위해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을 때, 귓가를 울리는 점심시간이 끝나가는 종소리. 그 소리를 듣고 스가와라는 가볍게, 그렇지만 한 없이 가볍지는 않게. 그렇게 뒤돌아섰다. 질문을 끝까지 듣지 않아도 물어보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았을 터. 하지만 그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그에게 고백한 그 소녀만이 서 있었을 뿐.
*
점심시간에 이치노세 하루카가 스가와라 코시에게 의리 초코가 아닌, 진심이 담긴 초코를 주었다는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카라스노 고교에서 예쁘기로 나름 소문난 이치노세 하루카를 찬 남자, 라는 말로 사와무라가 스가와라를 놀리자 가볍게 그를 바라보면서 싱긋, 하고 청량한 웃음을 지을 뿐, 스가와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와무라 뿐만이 아니라 5교시가 끝나고 나서 배구부 후배인 타나카와 니시노야가 뛰어와선
‘스가와라상!!!! 고백 받았는데 거절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라는 작은 소동을 부렸던 것을 빼면, 나름 순탄하게 오후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지나가는 시간 동안 스가와라는 계속해서 핸드폰만을 확인하고 있었을 뿐, 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다만, 매 쉬는 시간마다 한, 두 명의 학생들에게 의리 초코를 받거나, 진심 초코를 주며 고백하려는 여학생들의 부름에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 그리고 그 진심 초코를 손에 들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소문이 되어 학교 내부를 돌고 있었다.
*
백금색 머리카락은 웨이브를 만들며 등 위에서 탄력 있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녀의 이마를 사뿐히 가린 앞머리는 그녀의 이마를 살랑이며 간지럽히고 있었다. 아래로 갈수록 옅어지는 머리카락 위로 빨간색 체크무늬 베레모와 함께 채우지 않은 검은 코트. 그 아래로 보이는 붉은 체크무늬 치마가 한 세트인지 단정한 모습의 리아가 카라스노 고등학교 교문 앞에 도착한 것은 수업 시간이 끝나기 바로 5분 전. 그러니까 3시 25분이었다. 급하게 차려입은 것 치고는 나름 괜찮지, 하면서 나온 그녀의 모습은 생각보다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
수업이 끝나고 교문 앞에 서 있는 리아의 모습에 학생들이 웅성거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작은 프랑스 인형같이 생긴 작은 소녀가-그것도 처음 보는, 그리고 고백할 것처럼 붉은색 상자를 들고-서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웅성거림 속, 작게 미소 짓는 한 소년이 있었다.
각자의 종례가 끝나고 교문 앞 작은 소녀에게 많은 이들이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백금발과 연녹색 눈동자. 에메랄드를 박아 넣은 것만 같은 그 눈동자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을 때, 어색하게 웃으면서도 살짝은 겁에 질린 것만 같은 눈동자가 한참을 흔들릴 때 쯤 어떤 한 소녀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누구 기다려?”
일본인처럼 생긴 외모는 아니었기에, 영어로 물어본 질문에 자신을 배려하는 질문이라는 걸 알고선 리아는 생긋, 예쁘게 웃으며 일본어로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을 때 들려오는 한 남자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그녀에게 질문한 소녀는 표정을 일그러트렸고, 맑게 웃으며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뛰어 안기는 그녀의 모습과, 목소리의 주인공에게 시선이 몰렸을 때, 주위의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리아야.”
“오빠!”
그러니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녀에게 말을 건 소녀-이치노세 하루카-의 고백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고백을 거절한 주인공인 스가와라 코시였으니까.
*
품에 안겨온 리아에게서 붉은 상자를 받아 들고 선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는 스가와라의 눈빛이 살짝 어두워진 건 순간이었다. 주위를 돌아보다가 품에 안긴 리아가 살짝 꼬물거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상큼한 웃음을 지으며 리아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자 부끄러워하며 붉어진 얼굴을 가리는 리아와, 동시에 짙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주위를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기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 짙은 눈빛에 그들의 주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사와무라의 입술에서 깊은 한숨이 나오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그런 그의 모습을 알 수 없었다. 단 한 사람, 스가와라 코시를 제외하곤.
*
자리를 옮겨 작은 카페에 앉아 리아에게서 받은 초콜릿을 열어보자 아기자기한 하트 모양의 초콜릿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었다. 그런 모습에 씩, 웃어 보이는 스가와라의 모습에 일단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직접..만든거라..맛은 장담 못하지만..”
말을 줄이는 그녀의 모습에 씩 웃으며 내려다 본 초콜릿은 직접 만든 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완벽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단 한 가지 모양만 빼고.
“리아야, 근데 이건 뭐야?”
갈색 초콜릿 위에 주황색 선과, 초록색 선으로 무엇인가가 그려져 있는 것 같은 모양. 어디서 많이 본 모양임에도 불구하고 팍, 떠오르지 않자 결국 질문한 스가와라의 모습에 어색하게 웃어 보이는 리아였다.
“그..배구..배구공이에요..모양..이상하죠..노력은 해 봤는데..영 아닌 거 같아서..”
역시 빼는 것이 가장 나았을 것이었다. 넣을까 말까, 제일 많이 고민했던 초콜릿이었다. 뭔가 의미 있는 초콜릿 모양을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그게 그녀 마음대로 되지 않아 결국 실패 아닌 실패를 해 버린 초콜릿이었기 때문에 끝까지 고민을 하다 결국 넣은 초콜릿이었는데.
“맛있다, 리아야.”
그가 그 초콜릿을 제일 먼저 입안에 넣고 우물우물 씹을 것이라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그가 그 초콜릿을 먹었을 때 리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뻐, 마음에 들어. 누가 만들어 준 초콜릿인데. 너 마음만으로도 충분해. 못생기지 않았어. 모양이 이상하지도 않아. 이 모든 말을 축약해서 스가와라가 말한 것은 저 한마디였다. 상냥하게 다 말해주기는 싫었다. 그냥, 그냥 그녀가 그를 위해서 해 줬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표현하지 않는 것은 그의 취향에는 맞지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울먹일 것만 같은 그녀의 모습에 가장 먼저 튀어나온 말은 바로 그것이었다.
“진짜요?”
초콜릿 안에 오렌지 시럽을 넣은 것인지 달달한 초콜릿과 상큼한 오렌지 향이 어울려져 스가와라의 입 안을 맴돌고 있었다.
“응, 진짜.”
믿지 못하는 것인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보는 모습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몸을 일으켜 그녀의 옆으로 다가갈 때 까지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는 그였다. 눈꼬리를 살짝, 눈웃음을 살짝. 사랑스러운 그녀의 입술에 아주 가볍게.
*
리아 스텔리어는 알지 못했다. 스가와라 코시는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리아 스텔리어의 입술은 미치도록 달디 단 초콜릿과 같았고, 스가와라 코시는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과는 모순되게 리아 스텔리어에게 건네는 가벼운 키스를 제일 좋아했다.
*
그런 커플들의 모습을 축복이라도 하는 듯, 하늘에선 흰 눈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성 밸런타인데이의 날이었다.
'Dream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가리아] 빗방울 전주곡 (0) | 2018.01.01 |
---|---|
[지효화영] 紅連 (0) | 2017.09.26 |
[스가리아] 사계절이 전부 너였다. (0) | 2017.08.31 |
[스가랠] 말할 수 없는 비밀 (0) | 2017.08.11 |
[스가리아] 달콤한 여름밤 (0) | 2017.08.05 |